씨앗언어
말이 시민을 적으로 만든다
신조어는 복잡한 현실을 재치 있게 압축하지만 사람까지 하나의 집단으로 압축할 수 있다. 진영의 딱지와 참여를 좇는 알고리즘이 만날 때 시민은 상대의 주장보다 소속부터 판정하게 된다. 시민의 언어는 좋은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사람을 편으로 나누는 대신 문제를 구체적으로 나누고 근거와 비용, 결과와 책임을 묻는다.
핵심 요약
- 우리는 사람의 이름보다 ‘이대남·이대녀·영포티·한남·한녀’ 같은 집단의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기 시작했다.
- ‘혐오·극우·종북·카르텔’ 같은 말은 구체적 근거 없이 사용될 때 상대를 대화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한다.
- ‘참교육·사이다·나락’은 문제 해결보다 누군가가 응징당하는 장면에 만족하게 만들 수 있다.
- 시민의 언어는 좋은 가치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가치라도 근거와 비용, 결과와 책임을 묻는 언어다.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의 이름을 잃었나
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아야 한다.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어떤 제도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와 온라인 공간은 사람을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다.
대신 짧은 이름을 붙인다. 이대남, 이대녀, 영포티, 한남, 한녀, 틀딱, 맘충이라고 부른다. 사람의 이름은 사라지고 세대와 성별, 계층과 정치 성향을 표시하는 꼬리표만 남는다.
이런 말들은 처음부터 모두 혐오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대남·이대녀’는 선거에서 나타난 청년층의 차이를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됐고, ‘영포티’는 젊은 감각과 소비력을 지닌 40대를 가리키는 마케팅 용어에서 출발했다. 젊은 세대가 겪는 취업난과 주거 불안, 병역 부담과 젠더 갈등을 드러내고 권위적인 기성세대를 풍자하는 언어도 필요했다.
문제는 현실을 설명하던 말이 사람을 판결하는 말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대남’이 20대 남성의 다양한 삶을 하나의 정치 성향으로 묶고, ‘이대녀’가 청년 여성의 서로 다른 생각을 하나의 젠더 의식으로 단정할 때 언어는 현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지워버린다.
신조어는 현실을 압축하지만 사람도 압축한다
신조어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신조어에는 젊은 세대의 재치와 유머가 있고, 기존 언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실을 단번에 드러내는 힘도 있다.
‘흙수저’는 노력만으로 넘기 어려운 자산 격차를 보여줬다. ‘영끌’은 집값 상승에서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담았다. ‘벼락거지’는 성실하게 일하고 저축한 사람이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된 현실을 표현했다.
하지만 이런 말이 반복되면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집이 없는 시민은 어느 순간 ‘실패한 사람’으로 취급되고, 자산을 가진 사람은 각자의 형성 과정과 무관하게 ‘기득권’으로 묶인다. 개인이 처한 구체적인 조건보다 어느 집단에 속하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말은 현실을 묘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무엇을 부러워하고 누구를 원망하며, 어떤 사람과 연대하고 어떤 사람을 배제할 것인지에도 영향을 준다.
진영의 언어는 사람보다 적을 먼저 만든다
좌빨, 종북, 토착왜구, 극우, 개딸, 수박, 카르텔, 반국가세력 같은 말은 서로 기원과 의미가 다르다. 일부는 정치적 분석에 필요한 개념이고, 일부는 특정 집단이 스스로 사용한 이름이며, 일부는 처음부터 상대를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런 말이 구체적인 사실과 행위를 설명하지 않고 사람 전체를 규정하는 딱지로 사용되면 작동 방식은 비슷해진다. 상대의 정책이 왜 잘못됐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어지고, 어떤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필요도 사라진다. 상대에게 적절한 이름만 붙이면 판단은 끝난다.
진보 진영의 일부는 반대자를 ‘혐오·극우·기득권’으로 부르고, 보수 진영의 일부는 반대자를 ‘종북·좌파·반국가세력’으로 부른다. 사용하는 단어는 다르지만 상대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묻기보다 어느 편인지 먼저 판정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그 순간 정치는 정책의 경쟁이 아니라 도덕적 신분의 전쟁이 된다. 우리 편은 실수해도 선한 의도가 있고, 상대편은 옳은 말을 해도 숨은 의도가 있다고 믿는다.
하상응의 2022년 연구는 한국 유권자에게서 중도층이 줄어드는 전형적인 이념 양극화의 증거는 뚜렷하지 않지만, 상대 정당과 지지자를 점점 더 부정적으로 느끼는 정서적 양극화의 흔적은 확인된다고 분석했다. 시민들이 생각의 차이뿐 아니라 감정의 적대에 의해 갈라지고 있다는 경고다.
‘참교육’은 언제 응징의 언어가 되었나
참교육은 본래 참다운 교육,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온라인 공간에서는 잘못한 사람을 공개적으로 망신주거나 강하게 응징하는 장면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
사이다, 박제, 좌표찍기, 나락 같은 말도 비슷한 장면에서 등장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길고 복잡하지만 누군가가 몰락하는 장면은 짧고 강렬하다. 시민은 해결 과정에 참여하기보다 응징의 장면을 소비하게 된다.
잘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책임을 묻는 것과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은 다르다. 법과 제도를 통해 잘못을 바로잡는 것과 온라인 군중이 사실관계와 형벌의 크기를 함께 결정하는 것도 다르다.
연지영·이훈의 2020년 온라인 실험은 유머가 결합된 젠더 혐오표현이 단순한 농담처럼 받아들여지면서, 사람들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경향을 강화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풍자와 유머는 권력을 비판하는 시민의 무기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적대를 가볍게 유통하는 포장지가 될 수도 있다.
‘참교육’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순간 응징하는 사람은 정의의 편에 서고, 응징당하는 사람은 설명할 기회를 잃기 쉽다. 교육의 언어가 처벌의 언어로 뒤집히는 순간이다.
좋은 가치도 권력의 언어가 될 수 있다
인권감수성, 기후위기, 기후정의, 사회적 가치, 공정한 전환, 포용과 다양성은 모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는 말이다. 이 말들이 가리키는 현실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
기후변화는 과학적으로 검토하고 대응해야 할 현실이며, 인권은 누구에게나 보장돼야 할 기본적인 권리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산업 전환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시민을 살피는 일도 필요하다.
그러나 좋은 가치를 담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말이 질문받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인권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말로 한 사람의 내면을 판정하기 전에 누구의 어떤 권리가 어떤 행위로 침해됐는지 밝혀야 한다. ‘기후위기’를 말할 때도 대응 정책의 효과와 비용, 산업과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 다른 대안의 가능성을 함께 설명해야 한다.
‘사회적 가치’를 내세우는 사업이라면 누가 혜택을 받았고 얼마의 비용이 들었으며 실제로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지를 공개해야 한다. ‘공정한 전환’도 선언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와 비용을 부담하는 소비자, 결정에서 배제된 지역주민의 목소리를 확인해야 한다.
좋은 말이 검증을 면제받는 순간, 가치는 권력이 된다.
참여를 좇는 알고리즘은 분노의 언어를 키울 수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플랫폼에서는 차분한 설명보다 강한 감정을 담은 말이 빠르게 확산되기 쉽다. 긴 설명보다 짧은 조롱이 공유되기 쉽고, 신중한 질문보다 확신에 찬 비난이 더 많은 반응을 얻는다.
신정섭의 2024년 연구는 제20대 대통령선거 유권자의식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 빈도가 높을수록 상대 정당에 대한 적대적 감정과 정서적 양극화 수준이 높은 관련성을 보였다고 밝혔다. 특히 자신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만족도가 낮은 사람에게서 그 관계가 더 크게 나타났다.
해외 연구에서도 비슷한 위험이 관찰됐다. 2025년 《PNAS Nexus》에 실린 트위터 알고리즘 감사 연구는 참여도를 기준으로 게시물을 배열하는 방식이 단순한 시간순 배열보다 감정적으로 격앙되고 상대 진영에 적대적인 정치 게시물을 더 많이 노출시켰다고 보고했다.
이 결과들만으로 온라인 커뮤니티나 알고리즘이 시민을 직접 극단화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미 강한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이 특정 커뮤니티를 더 자주 이용할 수 있고, 한 플랫폼에서 확인된 결과를 모든 플랫폼에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다.
그러나 경제적 불만과 집단 정체성이 진영의 언어를 만나고, 참여를 좇는 알고리즘이 그 언어를 반복적으로 노출할 때 적대감이 강화될 가능성은 충분히 경계해야 한다. 시민은 판단하는 주체가 아니라 분노를 전달하고 우리 편임을 증명하는 매개체로 작아질 수 있다.
시민의 언어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나눈다
진영의 언어는 사람을 편으로 나눈다. 시민의 언어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나눈다.
시민의 언어로 되돌린다는 것은 거친 말을 점잖은 말로 순화한다는 뜻이 아니다. 누가 옳은 편인지 판정하기 전에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묻는 것이다.
‘혐오’라고 규정하기 전에 불쾌한 의견과 모욕, 차별적 대우와 폭력 선동을 구분해야 한다. ‘카르텔’이라고 부르기 전에 누가 어떤 권한과 자원을 독점했고, 어떤 규칙을 이용해 경쟁을 막았는지 밝혀야 한다.
‘이대남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대신 병역·일자리·주거·연금 제도가 서로 다른 청년 남성에게 어떤 부담을 주는지 물어야 한다. ‘기성세대가 탐욕스럽다’고 비난하기 전에 자산과 연금, 고용제도가 세대별·계층별로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 확인해야 한다.
집단의 이름을 구체적인 제도의 언어로 바꾸고, 선악의 판정을 권리와 책임의 언어로 바꾸며, 좋은 의도를 비용과 결과의 언어로 바꾸는 것. 그것이 시민의 언어다.
말을 시민에게 돌려주자
시민은 진영이 붙여준 이름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시민은 스스로 묻고 판단하며, 국가와 시장과 시민사회의 권력을 감시하는 주체다.
그러나 시민이 상대의 이름을 잃고 진영이 붙인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기 시작하면 정치는 시민의 판단을 빼앗는다. 말이 짧아질수록 생각도 짧아지고, 상대를 부르는 이름이 거칠어질수록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영역은 좁아진다.
씨앗의 소리는 앞으로 자유·민주·공익과 같은 오래된 개념뿐 아니라 지금 시민들의 입과 온라인 공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새로운 말도 살펴보려 한다. 그 말이 어떤 현실에서 태어났고, 언제부터 진영의 언어가 됐으며, 시민의 관계와 판단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추적할 것이다.
목표는 어느 진영의 언어를 다른 진영의 언어로 교체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이 다시 생각하고 질문할 수 있는 말로 되돌리는 것이다.
사람을 설명하는 말이 사람을 판결하는 말이 되고, 현실을 풍자하는 말이 상대를 제거하는 말이 되며, 공통의 문제를 말하던 언어가 진영을 동원하는 암호가 되는 순간을 경계해야 한다.
진영의 언어는 사람을 편으로 나눈다. 시민의 언어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나눈다. 이제 말을 시민에게 돌려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