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언어
무엇이 진짜 진보인가
나는 보수다. 그러나 국가권력을 제한하고 시민의 자유를 넓혀야 한다는 점에서는 진보다. 진보와 보수는 선과 악의 신분증이 아니라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지킬 것인지 묻는 가치다. 진보라는 이름도 자기편의 권력을 지키는 간판이 되는 순간, 앞으로 나아간다는 본래 뜻을 잃는다.
핵심 요약
- 진보와 보수는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를 묻는 서로 다른 가치다.
- 개혁과 수구는 잘못된 제도와 자신이 가진 권력까지 고칠 수 있는지를 묻는 태도다.
- 보수는 개혁적일 수 있고 진보는 수구적일 수 있다.
- 진보라는 이름을 가졌더라도 시민의 자유를 줄이고 자기편의 권력을 지킨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세력이라 부르기 어렵다.
나는 보수다. 그러나 나는 또한 진보다
나는 보수다. 그러나 나는 또한 진보다.
대한민국 헌법 제4조가 밝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라고 믿는다. 동시에 국가권력은 제한되어야 하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말하고 선택하고 도전할 자유는 지금보다 더 넓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헌법재판소가 설명한 민주적 기본질서도 어느 한쪽의 정치적 구호와는 거리가 멀다. 개인의 자율적 이성을 믿고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가 함께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다수결을 존중하되 소수의 권리를 지키고, 국민주권과 기본권, 권력분립과 복수정당제를 통해 폭력적이고 자의적인 지배를 막는 질서다.
나는 시장과 기업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시장을 왜곡하는 특권과 불공정까지 자유라는 이름으로 감싸자는 뜻은 아니다. 법치와 제도의 안정은 중요하지만, 시민의 선택을 막고 새로운 기업의 진입을 가로막는 낡은 제도까지 보존할 이유는 없다.
이렇게 보면 보수와 진보는 한 사람 안에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사람이 국가권력과 기득권의 개혁을 요구할 수 있고, 시장의 자유를 믿는 사람이 정경유착과 불공정 거래에 더 엄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 정치는 이런 복합적인 생각을 잘 허용하지 않는다. 식사 자리에서 어느 정당의 정책 하나를 지지한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 정당이 저지른 모든 잘못까지 옹호하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반대편에서는 곧바로 ‘꼴통’이라는 낙인을 찍고, 긴 대화는 시작되기도 전에 끝난다.
정치적 입장이 생각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의 인격과 도덕성을 판정하는 신분증이 된 것이다. 그 신분증이 앞에 놓이면 한 사람이 가진 여러 생각과 살아온 경험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진보라는 이름은 어떻게 신분증이 되었나
진보는 한자로 ‘進步’, 말 그대로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영어 progress도 라틴어 progressus에서 왔다. 두 말에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간다는 기대가 담겨 있다.
다만 progress와 progressivism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Progress가 넓은 의미의 전진과 개선이라면, progressivism은 근대 이후 형성된 정치사상과 개혁운동을 가리킨다. 오늘날에는 노동권과 복지, 사회적 평등과 소수자의 권리를 넓히고 이를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인정하는 흐름과 주로 연결된다.
여기까지는 말의 기본적인 설명이다. 정치의 판단은 그다음부터 시작된다.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가. 누구의 자유가 넓어지고, 누가 새 권력을 얻으며, 누가 선택권을 잃는가.
새 제도를 만들고 정부 조직을 늘리는 것도 변화다. 그러나 그 결과 시민이 허가를 더 많이 받아야 하고, 다른 의견을 말할 공간이 줄어들었다면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진보라 부르기는 어렵다. 기술과 제도 역시 전쟁과 전체주의, 식민지배와 환경 파괴에 사용된 역사가 있다. 역사는 저절로 좋은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한국 정치에서는 이 결과를 따지기 전에 ‘진보’가 특정 정치세력의 이름으로 먼저 굳어졌다. 진보정당, 진보시민단체, 진보언론이라는 말은 어느 순간 정치적 소속을 표시했고, 이들과 다른 의견을 내면 개혁에 반대하는 수구세력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앞으로 나아가는지를 확인하는 말이, 누구 편인지를 확인하는 신분증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뒤죽박죽 섞여 있다
한국 정치의 진보와 보수는 북미와 서유럽의 좌우 구분표에 그대로 넣기 어렵다. 서구의 주류 진보정치는 대체로 노동권과 복지, 사회적 평등, 소수자의 권리와 문화적 다양성을 강조하고, 보수정치는 전통과 공동체, 시장경제와 제도의 연속성을 더 중시한다. 물론 서구 안에서도 민족주의적 진보와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보수가 함께 존재한다.
한국은 분단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를 한꺼번에 통과했다. 그래서 하나의 사람이 경제에서는 시장을 지지하면서 복지에서는 국가의 역할을 요구하고, 안보에서는 동맹을 중시하면서 문화 문제에서는 개인의 선택을 옹호하기도 한다.
한국의 진보 안에는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사회민주주의, 여성·생태·소수자 운동의 계보가 함께 있다. 여기에 분단 극복과 민족자주, 통일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흐름도 존재한다. 더불어민주당과 진보정당은 같은 정치세력이 아니며, 진보정당 안에서도 노동과 복지, 민족자주와 통일, 생태와 소수자 권리를 강조하는 정도가 서로 다르다. 시민사회도 하나의 지휘를 받는 조직이 아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도 살펴볼 대목은 남는다. 일부 진보세력은 외세와 제국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북한의 권위주의와 인권 문제 앞에서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통일과 민족자주가 북한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보다 앞선다면, 그 태도는 진보라는 이름과 별개로 폐쇄적 민족주의에 가까워진다.
반대로 한국의 보수는 한미동맹과 수출경제, 세계시장과 국제질서를 중요하게 다루어 왔다. 안보와 통상에서는 대외개방과 국제협력을 강조해 온 셈이다. 하지만 동맹과 수출을 중시한다고 곧바로 세계시민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민과 난민, 문화적 다양성 앞에서 일부 보수세력이 보이는 폐쇄성은 또 다른 얼굴이다.
경제정책으로 들어가면 경계는 더 흐려진다. 진보정당도 성장과 수출, 국가주도 산업정책을 말하고 보수정당도 복지 확대와 사회안전망, 정부의 산업 지원을 약속한다. 실제 다툼은 시장이냐 국가냐라는 두 단어보다, 어디까지 개입하고 그 비용과 권한을 누가 부담하느냐에 가깝다.
한국의 진보와 보수가 통째로 자리를 바꾼 것은 아니다. 민족과 안보, 시장과 복지, 자유와 문화라는 여러 축이 서로 어긋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복잡한 생각을 ‘어느 정당과 지도자를 지지하는가’라는 한 줄로 줄여버린다. 그 한 줄이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가장 강한 기준이 되었다.
진보와 보수, 개혁과 수구는 다른 말이다
여기서 진보와 보수라는 한 쌍 옆에 개혁과 수구라는 또 다른 한 쌍을 놓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진보를 개혁과 같은 말로, 보수를 수구와 같은 말로 사용한다. 그러면 진보는 자연스럽게 좋은 편이 되고 보수는 나쁜 편이 된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는 본래 선과 악을 가르는 말이 아니다.
진보와 보수는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를 묻는 말이다.
개혁과 수구는 잘못된 현실과 자신이 가진 권력까지 고칠 수 있는가를 묻는 말이다.
보수가 지켜야 할 것은 기득권자의 자리가 아니다. 시민의 자유와 법치, 책임과 신뢰, 재산권과 시장의 자율성처럼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될 가치다. 진보가 바꾸어야 할 것도 반대편 사람 자체가 아니라 불공정한 제도와 닫힌 기회,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과 시대에 맞지 않는 특권이다.
보수는 개혁적일 수 있고 진보는 수구적일 수 있다.
시장의 특권과 정경유착을 고치고 국가권력을 제한하며 낡은 진입장벽을 걷어내는 보수는 개혁적이다. 반대로 과거의 민주화 경력과 도덕적 우월감을 앞세워 지금 차지한 권력과 예산, 조직을 지키려는 진보는 수구적이다. 새로운 세대의 문제 제기를 진보에 대한 공격으로만 받아들이는 순간에도 그렇다.
낡은 권력에 맞섰다는 과거가 오늘 가진 권력까지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이 구분을 놓치면 우리는 이름만 보고 개혁을 판단하게 된다.
진보는 언제 수구가 되는가
군사독재에 맞서 싸운 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 희생과 저항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선거와 표현의 자유도 훨씬 늦게 왔을 것이다. 그만큼 무겁게 다뤄야 할 역사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경력이 진보의 영구면허가 될 수는 없다. 과거에 권력의 감시자였다는 사실과 오늘도 권력을 제대로 감시하고 있다는 평가는 서로 다른 문제다.
야당일 때는 권력분립과 언론의 자유를 외치다가 집권한 뒤 사법부의 판단과 언론의 비판을 개혁의 방해물처럼 대할 수 있다. 시민단체의 독립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자기편 정부의 위원회와 공공기관 자리를 당연한 몫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다. 기업의 특권을 비판하면서도 정부가 인허가와 지원을 지렛대로 기업을 정책 방향에 줄 세우는 장면에는 침묵할 수 있다.
그때 시민이 실제로 겪는 변화는 분명하다. 다른 의견을 말할 공간은 좁아지고, 정부와 가까운 조직의 발언권은 커진다. 이름은 진보인데 시민의 선택은 줄어들고, 말은 개혁인데 국가와 조직의 권한만 늘어난다.
진보를 개혁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면 이 모순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자기편이 추진하는 일은 시작부터 개혁이 되고, 반대하는 시민은 내용을 따지기도 전에 수구나 반동이 된다. 정책이 누구에게 권한을 더 주었고 시민에게 어떤 비용을 남겼는지는 토론 밖으로 밀려난다.
수구는 오래된 생각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신이 차지한 자리와 예산, 영향력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시민의 목소리를 막는 태도도 수구다. 진보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시작하는 순간, 진보라는 이름은 수구를 가리는 간판이 된다.
보수는 언제 수구가 되는가
이 기준은 보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보수가 자유와 법치를 말하면서 자기편 권력의 위법과 특권을 감싸면 수구가 된다. 시장경제를 말하면서 정경유착과 진입장벽을 지키고, 안보를 내세워 시민의 비판과 표현을 억누른다면 지키는 것은 가치가 아니라 권력이다.
산업화와 경제성장은 분명 한국 사회를 바꾼 큰 성취다. 하지만 그 성취도 영구면허는 아니다. 과거의 성장으로 오늘의 무능과 특권을 덮을 수 없고, 제도의 안정을 이유로 새로운 세대와 작은 기업의 도전을 막을 수도 없다.
예를 들어 기존 사업자의 질서를 보호한다며 새로운 서비스의 진입을 무작정 늦추거나, 대기업에는 열려 있는 정책 통로가 작은 기업에는 닫혀 있다면 그것은 시장을 지키는 일이 아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의 시장을 지키는 일이다.
책임을 말하는 목소리가 힘없는 시민에게만 향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너그러워질 때, 보수의 이름도 수구의 간판이 된다. 보수의 가치는 지킬 만한 것을 지킬 때 살아 있다. 자유를 줄이고 특권을 보호하는 보수는 자신이 지키겠다고 한 가치부터 배반한다.
기업의 도전을 막는 것이 진보인가
진보가 자본과 기업의 권력을 비판해 온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 납품단가 후려치기 같은 불공정 거래, 노동자의 안전과 권리를 가볍게 다루는 기업은 엄격하게 감시받아야 한다.
하지만 기업의 이윤과 성장 자체를 의심하고 규제와 처벌이 늘어나는 것을 곧 개혁의 성과로 여긴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규제가 누구의 특권을 없앴는지, 아니면 새로운 기업이 들어올 문만 더 좁혔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작은 기업이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으려 할 때 여러 부처의 허가를 반복해서 받고, 기존 사업자는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을 신생기업은 견디지 못한다면 규제의 결과는 공정이 아닐 수 있다. 소비자는 선택할 기회를 잃고, 창업자는 도전을 포기하며, 일자리를 찾던 시민도 가능성 하나를 잃는다.
기업은 몇몇 대주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안에는 일하는 시민과 제품을 선택하는 소비자,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창업자와 협력업체가 함께 있다. 기업의 특권을 감시하는 일과 기업의 도전을 가로막는 일은 전혀 다르다.
기업의 특권은 감시하되 기업의 도전은 보호해야 한다. 시장의 자유를 지키되 불공정은 고쳐야 한다. 이것을 진보와 보수 가운데 어느 한쪽만의 가치로 가를 이유는 없다.
무엇이 진짜 진보인가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진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거창한 선언보다 시민의 삶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 시민의 자유를 넓혔는가.
정부와 정당, 시민단체의 권한이 커졌다는 사실만으로 사회가 앞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다. 시민이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더 자유롭게 말하고 선택하며 도전할 수 있게 되었는지, 정책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삶의 결정권자로 서게 되었는지가 기준이다.
둘째, 자기편의 권력도 같은 기준으로 감시하는가.
상대 진영의 인사와 예산에는 현미경을 들이대면서 자기편 정부의 위원회 자리와 공공기관 인사에는 침묵한다면 그것은 진보가 아니라 진영의 충성이다. 권력 감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일이 아니다.
셋째, 반대하는 시민의 권리를 인정하는가.
민주주의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 참여하는 제도가 아니다. 회의장에서 듣기 불편한 주장에도 발언 시간을 보장하고, 온라인에서 몰려오는 비난 속에서도 반대 의견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반대자를 설득하기보다 수구·반동·극우라는 이름부터 붙여 밀어내는 정치는 진보적일 수 없다.
넷째, 국가와 조직보다 시민의 선택을 존중하는가.
국가는 시민을 보호해야 하지만 시민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시민단체도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지만 시민 전체의 이름을 독점할 수는 없다. 정책을 만드는 정부와 예산을 받는 단체만 이야기하고 정작 당사자인 시민은 설명회에 앉아 듣기만 한다면, 선한 목적도 시민을 통제하는 권력이 될 수 있다.
다섯째, 새로운 도전이 들어올 공간을 열어놓았는가.
진보는 낡은 문을 닫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기업과 기술, 새로운 세대와 생각이 들어올 문을 함께 열어야 한다. 자신들이 만든 제도와 조직을 지키기 위해 다음 사람의 도전을 막는다면, 이미 앞으로 나아가는 세력이라 부르기 어렵다.
진보는 왼쪽의 소유물이 아니다
국가의 지나친 간섭으로부터 시민과 기업의 자유를 지키는 일도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기득권이 된 시민단체를 감시하고, 다수의 힘 앞에서 소수의 반론을 보호하며, 시장에 들어오려는 작은 기업과 새로운 도전자의 길을 여는 일도 마찬가지다.
진보는 왼쪽의 소유물이 아니다.
보수적인 가치를 가진 사람도 지켜야 할 자유를 지키면서 바꾸어야 할 권력을 바꿀 수 있다. 반대로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도 자신이 차지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시민의 자유와 새로운 변화를 막는 순간 수구가 될 수 있다.
진보를 판단하는 기준은 과거에 누구와 싸웠는가가 아니다. 지금 누구의 자유를 넓히고 있는가다. 어느 정당에 속했는가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권력까지 제한할 수 있는가다. 이 기준은 왼쪽과 오른쪽 어느 쪽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진보는 과거의 훈장이 아니라 오늘의 태도다.
지킬 것은 자유이고, 바꿀 것은 권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