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언어
관용은 무조건 받아들이는 미덕이 아니라 공동의 질서를 지키는 책임이라는 말이다
관용은 개인의 너그러움을 넘어 이민정책과 선거, 국가의 사회통합을 둘러싼 정치적 쟁점이 됐다. 프랑스의 똘레랑스와 PC주의, 이민자 증가 및 유럽의 정책 변화를 살펴보고 공통의 법질서와 시민의 자유를 함께 지킬 원칙을 묻는다.
핵심 요약
- 관용은 다른 생각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자유를 존중하는 원칙이며, 그 적용에는 정당한 한계가 있다.
- 프랑스의 이민자 비중은 2025년 11.6%다. 이민정책은 유럽의 선거와 사회통합 의제로 부상했지만 이민자 모두가 선거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 관용을 정치적 도덕의 독점적 언어로 만들지 말고 공동의 헌법적 질서와 정책의 효과·비용·책임으로 검증해야 한다.
관용의 이름으로 무엇까지 바꿀 것인가
관용은 민주사회의 아름다운 덕목이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웃이 자신의 신념을 지킬 자유를 존중하는 태도다. 그런데 오늘날 유럽에서 관용은 개인의 예절을 넘어 국가의 정체성과 사회통합, 선거의 향방을 좌우하는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이민자와 난민을 얼마나 받아들일 것인가. 새로운 주민의 종교와 생활방식에 어디까지 제도를 맞출 것인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공통의 규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과거에는 소수자의 불이익을 줄이자는 말로 시작한 논쟁이 이제는 국가의 규칙을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문제로 확장되었다.
시민이 이민정책의 속도와 비용, 치안과 학교의 현실을 질문할 때 그 질문을 곧바로 혐오라고 규정한다면 공개 토론은 멈춘다. 반대로 이민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 자체를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취급해도 자유는 훼손된다. 관용이 요구하는 것은 침묵이나 무제한의 동의가 아니라, 공통 규칙의 한계를 시민이 직접 토론할 자유다.
**관용을 실천하기 위해 한 사회가 오랫동안 만들어 온 법질서와 통합의 원칙까지 포기해야 하는가.** 바로 이 질문이 오늘 유럽을 설명하는 출발점이다.
관용(寬容)과 똘레랑스(tolérance)의 뜻
관용(寬容)은 너그러울 관(寬)과 받아들일 용(容)을 합친 말이다. 일상에서 남의 잘못을 용서하거나 차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쓰인다. 서구 정치철학의 '똘레랑스(tolérance)'는 라틴어 tolerare, 곧 '견디다·참아내다·감당하다'에서 비롯되었다. 영어 tolerance와 정치철학의 toleration도 이 어원과 연결된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면 관용의 조건을 생각해 보면 된다. 상대방의 생각에 이미 동의한다면 관용할 이유가 없다. 관용은 나와 충돌하는 생각을 옳다고 평가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 종교가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존중하는 일은 그의 교리를 사실이라고 믿는 것과 다르다.
정치철학에서는 무엇을 반대하는가, 왜 그것을 허용하는가, 어디에서 거부할 것인가라는 세 질문이 함께 다뤄진다. 스탠퍼드 철학백과사전이 설명하는 관용의 반대·수용·거부라는 요소다.[1] 라이너 포르스트는 다수가 소수자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허가의 관용', 갈등을 피하는 '공존의 관용', 동등한 시민을 인정하는 '존중의 관용', 상대의 차이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가치 인정의 관용'을 구분했다.[1]
**관용은 모든 요구를 수용하라는 말이 아니다. 허용할 자유와 지켜야 할 규칙을 함께 정당화하는 정치적 원칙이다.**
프랑스의 똘레랑스가 탄생한 이유
16세기 프랑스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전쟁으로 흔들렸다. 1598년 낭트 칙령은 개신교도에게 제한적인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지만, 1685년 폐지되었다. 군주가 허락한 관용이 군주의 결정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 역사였다.
18세기 계몽주의의 볼테르는 1763년 『관용론』에서 종교적 편견과 박해를 비판했다. 존 로크는 앞서 『관용에 관한 편지』에서 국가가 개인의 종교적 양심을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다른 의견과의 공개적 논쟁이 사회의 오류를 수정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이 전통에서 관용은 국가권력이 개인의 양심과 생각에 개입할 수 있는 한계를 묻는 문제였다.
프랑스에는 세속주의인 라이시테(laïcité)라는 또 하나의 전통이 있다. 국가는 특정 종교를 강요하지 않고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되, 공적 영역의 규칙은 공화국의 법률로 정한다는 원칙이다. 학교의 종교적 복장과 공무원의 종교적 중립성 논쟁이 이 원칙에서 발생한다.
**프랑스의 관용은 다르게 믿을 자유를 보호하는 역사이면서, 서로 다른 시민에게 같은 공화국 규칙을 적용하려는 역사였다.** 한국에는 홍세화가 1995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 똘레랑스의 의미를 알렸다. 차이를 존중하자는 그 문제의식에 더해 오늘 필요한 질문은 공통 질서의 한계를 누가 정할 것인가다.
관용은 어떻게 PC주의와 정치적 권력의 언어가 되었는가
20세기 후반 인종·성별·종교와 문화적 소수자의 권리를 넓히려는 운동이 발전하면서 관용은 차별적인 언어와 관행을 시정하는 정치적 규범으로 확대되었다. 정치적 올바름, 이른바 PC(Political Correctness)는 그 과정에서 중요해진 말이다. 차별을 줄이려는 실천과 표현의 자유가 부딪치는 경계에서 무엇을 허용할지 논쟁이 커졌다.
관용에 정치적 목적을 직접 연결한 사상가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있다. 그는 1965년 「억압적 관용」에서 이미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존재할 때 모든 주장에 동일한 관용을 적용하면 현존 질서를 지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좌파 운동에는 더 넓은 관용을, 우파 운동에는 제한적인 관용을 적용하는 비대칭적 입장까지 옹호했다.[3]
마르쿠제의 주장이 현대 PC 운동 전체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관용을 보편적 자유의 원칙이 아니라 정치적 변화의 수단으로 사용할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특정한 정치세력이 도덕적 올바름의 기준을 독점하면, 다른 정책을 주장하는 시민은 반박의 대상이 아니라 침묵시켜야 할 대상으로 취급될 수 있다.
이민규모를 줄여야 한다거나 문화적 통합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근거와 비용을 따지는 대신 혐오라는 낙인을 찍는 순간, 관용은 자유를 보장하는 말에서 의견을 통제하는 말이 된다. 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법률 역시 적용 기준과 비례성을 검증받아야 한다. **좋은 말이라고 해서 그 말을 앞세운 권력까지 선한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이민 증가, 선거에서 드러난 갈등
프랑스 국립통계경제연구소(INSEE)의 2026년 10월 자료에 따르면 2025년 프랑스에 거주하는 이민자는 약 800만 명, 전체 인구의 11.6%였다. 1999년 7.3%에서 크게 늘어난 수치다. 이 가운데 약 33%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INSEE의 '이민자'는 외국에서 외국 국적으로 태어나 프랑스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귀화 후에도 통계상 이민자에 포함된다.[4]
교육과 주거, 노동시장과 복지, 종교적 관습을 둘러싼 문제가 정치의 중심으로 들어온 배경이다. 프랑스 공립학교에서 종교적 표식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시민권을 취득하기 위해 프랑스어와 공화국의 가치를 얼마나 이해해야 하는지가 더 이상 학술적인 논쟁에 머물지 않는다.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이민 통제와 국경 관리를 강조한 프랑스 국민연합(RN)은 31.37%를 득표했다.[5] 이 수치가 이민자 때문에 선거 결과가 바뀌었다는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물가와 재정,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 등 다른 요인도 크다. 그러나 이민과 통합이 프랑스 유권자들이 국가의 미래를 평가할 때 중요하게 다루는 정치적 쟁점이라는 사실은 보여 준다.
이민자의 투표권과 이민정책의 선거 효과는 구별해야 한다. 프랑스에서 국적을 취득한 시민은 법률의 요건에 따라 국가선거에 참여할 수 있지만, 비EU 국적의 외국인이 일반적으로 국가선거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EU 회원국 시민에게는 조건부 지방선거·유럽의회 선거권이 있다. **이민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새로운 시민의 정당한 정치 참여와 기존 유권자의 정책 평가라는 두 경로로 나타난다.**
유럽은 왜 통합의 조건을 다시 묻는가
독일의 2025년 총선에서 이민 통제 강화를 주요 의제로 제시해 온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20.8%를 득표했다. 2021년의 10.4%에서 두 배 수준이다.[6] 스웨덴 등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시민권 취득과 언어교육, 자립과 사회통합의 요건을 조정하는 논쟁이 이어졌다. 이 흐름을 단순한 진영 대립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유럽연합은 2026년 6월 12일 새로운 이민·난민 협약을 시행했다. 외부 국경에서의 등록과 보안 심사, 난민심사와 송환 절차, 회원국 사이의 책임 분담을 함께 제도화하는 내용이다.[7] 프랑스는 2026년 1월부터 귀화 신청자에게 프랑스어 B2 수준과 시민시험 합격을 요구하고 있다.[9] 국가는 이민자에게 무엇을 제공할지뿐 아니라 새로운 시민이 공통의 질서에 어떻게 참여할지도 묻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현재 난민 신청이 계속 늘고 있다는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2025년 EU의 최초 난민 신청은 약 66만 9,400명으로 2024년보다 27% 감소했다.[8] 오늘의 갈등은 신규 유입뿐 아니라 오랜 기간 누적된 정착, 주거와 교육, 지역사회의 분리, 행정 부담과 정책 신뢰의 문제다.
차별과 빈곤이 통합을 방해하는 경우에는 그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 폭력이나 강요, 법 위반이 확인되면 개인의 행위와 책임에 따라 법을 공정하게 집행해야 한다. 출신이나 종교를 이유로 집단 전체에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 **관용을 지속시키려면 법질서의 공정함과 국가의 실질적인 통합 능력이 함께 뒷받침되어야 한다.**
소수자의 배려가 사회통합의 문제로 바뀌는 지점
소수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일과 공동체의 공통 규칙을 계속 바꾸는 일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지킬 것인가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모든 요구를 관용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서로 다른 집단이 서로 다른 규칙 아래 살아가는 분리된 사회가 될 위험이 있다.
공립학교의 공통 교육과정, 종교의 자유와 성평등이 부딪치는 경우, 공공기관에서 지켜야 할 중립성, 이민자 밀집 지역의 행정과 안전 문제가 그렇다. 어느 사안도 '다양성이니까 받아들여야 한다' 또는 '원래 우리 문화가 이렇다'라는 한마디로 끝낼 수 없다.
지켜야 할 핵심은 특정 민족이나 다수자의 취향이 아니다. 헌법에 보장된 인간의 존엄과 법 앞의 평등, 민주적 절차, 표현과 종교의 자유, 공통의 법률이다. 기존의 관행이 부당한 차별을 포함한다면 고쳐야 한다. 반대로 문화적 차이를 이유로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공통의 법률을 무력화하려는 요구는 제한되어야 한다.
국가가 공통 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민을 배척한다는 뜻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자유와 책임 아래 살아갈 제도적 바탕을 지킨다는 뜻이다. 이 기반을 잃으면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사람은 보호받을 권리가 취약한 시민일 수도 있다.
한국도 이민정책을 도덕적 구호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한국도 저출생과 고령화, 노동력 부족 속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유학생, 결혼이민자와 장기거주자가 늘어나는 변화를 겪고 있다. 경제적 필요가 이민의 이유가 될 수 있지만,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일과 한 공동체의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이는 일에는 서로 다른 정책적 책임이 따른다.[10]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어떤 조건에서 받아들일 것인가. 지역의 학교와 주거, 의료와 행정서비스는 그 규모를 감당할 수 있는가. 장기 정착을 선택한 이들에게 어떤 언어교육과 법질서 이해를 제공하고 요구할 것인가. 시민은 이러한 질문을 공개적으로 할 권리가 있다.
국가가 관용을 명분으로 시민의 우려를 훈계하거나 비판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외국인과 귀화한 시민의 존엄과 합법적인 권리는 보호해야 한다. 이민정책은 도덕적 선악의 구호보다 구체적인 인구·노동·주거·교육·안전 데이터와 제도의 수용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시민단체의 역할도 이중적이다. 부당한 차별과 인권 침해를 감시하고, 이민정책의 비용과 통합 성과도 감시해야 한다. 어느 한 편의 권리를 대변한다는 이유로 시민 전체의 논의를 대신할 수는 없다. 국가를 감시하는 시민사회라면 정책의 선의보다 집행의 결과에 먼저 책임을 물어야 한다.
씨앗의 관점 — 관용을 지탱하는 공동의 질서
관용은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용기다. 그러나 그 자유가 지속되도록 공통의 규칙을 지키는 책임이 빠지면 관용은 유지될 수 없다. 사회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획일화하는 국가도 경계해야 하지만,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법질서를 포기하는 국가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우리가 요구할 것은 무조건적인 개방이나 무조건적인 배제가 아니다. 출신과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나 동등한 존엄을 누리되 같은 법률을 지키는 사회, 이민의 규모와 속도, 통합 비용을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사회다. 관용과 자유가 국가의 무능을 덮는 명분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관용은 정치 진영이 독점할 수 있는 도덕적 훈장이 아니다. 소수자의 권리도, 다수 시민의 정당한 걱정도 현실의 증거와 헌법적 원칙 앞에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관용의 이름으로 무엇까지 바꿀 것인가는 시민의 공개적 토론과 민주적 절차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
**관용은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명령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민이 함께 자유롭게 살기 위해 공동의 질서를 지킬 책임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