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언어
민주는 권력자의 깃발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다
같은 ‘민주’를 말하면서도 우리는 다른 정치질서를 상상한다. 말의 의미에서 시작해 자유와 다수결, 왕정적 정치문화, 보수의 구원자 정치와 ‘윤어게인’을 살피고, 민주화 이후 시민화의 기준을 제안한다. 이 글은 사실 자료와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씨앗의 소리의 정치비평이다.
핵심 요약
- 선거와 정권교체는 소중한 성취다. 그러나 제도의 민주화만으로 지도자와 시민의 관계까지 민주적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 조직이 시민을 대신하는 정치와 지도자를 구원자로 기다리는 정치는 모두 시민의 자율성을 약하게 한다.
- 자유는 다수의 폭주를 막고, 민주는 자유가 일부의 특권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는다.
- 민주를 되찾는다는 것은 우리 편 권력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반대자의 권리를 지키는 일이다.
같은 민주를 말해도 같은 정치를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를 말한다. 그러나 같은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민주는 선거와 다수결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광장에 모인 시민의 직접 참여다. 누군가는 사회·경제적 평등을 민주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헌법질서를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자신이 지지하는 세력의 결정은 민주이고 상대편의 결정은 반민주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말은 모두가 반대하는 말이 아니라 모두가 찬성한다고 생각하는 말일 수 있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서로 뜻이 통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나라와 정치체제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가 바로 그런 말이다.
같은 말을 사용하며 서로 다른 체제를 꿈꾸다
오래전 한 인권운동가와 우리 사회의 미래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우리 사회가 크게 바뀌어야 한다는 뜻으로 “대한민국 사회가 변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사용한 ‘변혁’은 작은 제도 개선을 넘어 낡은 관행과 부조리를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헌정질서를 바탕으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더욱 넓히자는 의미였다.
그러자 그는 내게 진짜 변혁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변혁을 너무 순진하게 이해하는 것 같다고도 했다. 대화를 이어가며 나는 그가 말하는 변혁을 대한민국의 헌정질서 안에서 이루는 큰 개혁이 아니라, 북한식 체제에 가까운 방향으로 국가의 성격을 바꾸려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는 당시 대화에 대한 나의 기억과 해석이며, 상대의 노선이 별도로 확인됐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같은 단어를 사용했지만 같은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
내가 그 대화에서 떠올린 것은 이른바 NL식 사고였다. 그러나 한 사람과 나눈 대화만으로 NL 계열 전체나 오늘의 특정 정당을 하나의 체제 구상에 묶을 수는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운동권 계보의 단정이 아니라, 일상적인 ‘큰 개혁’과 기존 질서를 대체하려는 ‘체제 변혁’이 같은 말 아래 섞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변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 NL이거나 북한식 체제를 지향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단어의 표면이 아니라 그 말로 무엇을 바꾸려 하는지, 변혁의 주체와 대상은 누구인지, 최종적으로 어떤 정치체제를 만들려 하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질서 안에서 자유를 확대하려는 것인지, 대한민국의 체제 자체를 대체하려는 것인지 물어야 한다. 모든 국민을 동등한 시민으로 보는지, 특정 계급과 집단만을 진정한 민중으로 인정하는지도 살펴야 한다.
정치적 언어에는 사전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이해하는 일상적 의미 위에 진영이 부여한 의미가 놓이고, 그 아래에는 특정 조직과 운동권만 정확히 알아듣는 노선적 의미가 숨어 있기도 한다. 변혁·민중·자주·해방·통일·평화·공공성·시민사회 같은 말들이 그렇다. 겉으로는 누구도 쉽게 반대할 수 없는 좋은 말이지만, 그 말이 가리키는 정치체제는 정반대일 수 있다.
‘민주’도 마찬가지다.
민이 주인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민주는 글자 그대로 민이 주인이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다시 질문해야 한다.
그 ‘민’은 누구인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포함되는가. 집권세력을 반대하는 사람도 동등한 시민인가. 소수자와 야당 지지자도 주권자의 일부인가. 아니면 특정 이념과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사람만 진정한 국민과 시민으로 인정되는가.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유롭다는 말은 같지 않다. 국민 전체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민주와 인민을 내세운 독재체제가 존재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수결만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된다면 선거에서 이긴 세력은 소수의 자유를 제한하고, 사법부와 언론을 장악하며, 자신에게 불리한 제도까지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다수결은 결정을 내리는 방법이지, 다수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백지위임장이 아니다.
시민 참여도 마찬가지다. 시민회의와 공론장, 타운홀미팅과 시민단체의 정책 참여는 민주주의를 보완할 수 있다. 그러나 조직되고 훈련된 일부 활동가가 평범한 시민 전체를 대신하기 시작하면 참여민주주의는 새로운 시민권력으로 변질된다. 누가 그들을 대표로 선출했으며 누구에게 책임지는지를 묻지 않는 시민 참여는 대의제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제 위에 또 하나의 권력을 세울 수 있다.
사회·경제적 평등 역시 민주주의의 중요한 조건이다. 형식적인 선거권만 있고 인간다운 생활과 실질적인 참여 기회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공허해질 수 있다. 그러나 결과의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 선택권을 과도하게 제한한다면 민주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민주적이다”라는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반드시 네 가지를 더 물어야 한다.
누가 시민으로 인정되는가. 어떤 절차로 결정하는가. 다수도 침해할 수 없는 권리는 무엇인가. 권력을 맡은 사람을 어떻게 견제하고 교체할 수 있는가.
자유가 빠진 민주는 민주가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1조에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선언한다. 동시에 제4조에서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명시한다. 여기서 ‘자유’는 민주 앞에 붙인 장식적인 수식어가 아니다. 민주적 권력이 넘어서는 안 될 경계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다수는 결정할 권리를 갖지만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다. 선거에서 이긴 권력도 국민 한 사람의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함부로 침해할 수 없다. 국회 다수당도 사법부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 국민의 지지를 받은 대통령도 법 위에 설 수 없다.
이 글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개인의 자율성, 정치적 견해의 다양성, 기본권, 국민주권, 권력분립과 실질적인 정치적 경쟁이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머릿수의 우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권력을 제한하는 체제여야 한다.
자유 없는 민주는 다수의 독재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민주 없는 자유도 소수의 특권으로 변질될 수 있다. 권력과 재산을 가진 일부에게만 자유가 허용되고 다수 시민이 정치적 결정에서 배제된다면 그것도 온전한 자유가 아니다.
자유와 민주는 서로 경쟁하는 가치가 아니다. 자유는 민주가 집단권력으로 폭주하는 것을 막고, 민주는 자유가 일부의 특권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는다. 자유민주주의는 두 가치가 서로를 제한하면서 서로를 완성하는 질서다.
역사적 인민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가르는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는 누가 정치적 주체로 인정되고 누가 그 의사를 해석하느냐는 문제다. 다만 ‘인민’이라는 단어 자체가 독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경계하는 인민민주주의적 사고는 특정 세력이 진정한 인민의 의사를 독점한다며 반대자를 배제하는 권력 논리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도 동등한 시민이다.
특정 계급이나 집단에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을 정치공동체의 바깥으로 밀어내면 문제가 달라진다. 특정 세력이 진정한 인민의 뜻을 독점적으로 해석하는 순간 반대자는 경쟁자가 아니라 극복하거나 청산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 논리는 어느 진영에서든 비자유주의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민주를 말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국민 안에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도 들어 있는가.
민주의 제도는 세웠지만 민주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에는 선거가 있고 정권교체가 가능하다. 국회·법원·정당·언론이라는 민주주의 제도도 갖추고 있다. 민주주의의 차체와 계기판은 어느 정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나라를 움직이는 엔진이 민주인가를 물으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이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제도가 없다는 사실 판단이 아니라, 그 제도와 실제 정치문화의 간극을 겨냥한 이 글의 평가다.
대한민국은 권위주의 통치에서 벗어나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고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이것은 결코 작은 성취가 아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선택하는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권력자를 대하는 시민의 태도와 정당의 운영 방식, 국가와 시민의 관계까지 민주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우리는 대통령을 직접 뽑게 됐지만 대통령을 왕처럼 대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정당을 만들었지만 지도자의 궁정처럼 운영한다. 시민사회가 성장했지만 일부 시민단체가 시민을 대신하려 한다. 국민주권을 외치지만 조직되지 않은 평범한 시민보다 결집한 지지층과 단체의 목소리가 더 큰 힘을 갖는다.
형식적 제도는 민주인데 실제 작동 방식은 왕정적이다. 대통령 선거는 5년마다 강력한 군주를 뽑는 행사처럼 변하고, 정당정치는 지도자와 계파를 중심으로 한 충성 경쟁이 된다. 국회의 다수 의석은 승자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권력의 허가증으로 오해된다. 시민 참여는 조직된 지지층의 동원이 되고, 공직 인사는 능력과 책임보다 충성과 관계에 대한 보상으로 변질된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라는 외형을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민주를 사회의 일상적인 작동원리로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왕정은 왕관을 쓰고 돌아오지 않는다
엄밀한 체제 분류에서 대한민국은 왕정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이다. 이 글이 말하는 ‘왕정적 정치’는 법적 국체가 아닌 권력관계의 비유다. 현대의 왕정적 정치는 선거와 정당, 국회라는 외형을 그대로 두면서 그 안의 관계를 전근대적으로 바꿀 수 있다.
대통령이 국민의 수탁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군주처럼 행동하고, 여당 지도부가 당원의 판단보다 대통령의 의중을 앞세우며, 국회의원이 권력자의 신하처럼 움직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공직과 당직이 능력보다 충성에 대한 포상으로 배분되고, 대통령 비판이 정책적 반론이 아니라 배신으로 취급된다면 민주주의 안에 궁정정치가 들어선 것이다.
이런 정치에는 왕관도 궁궐도 없지만 왕과 신하와 신민의 관계가 존재한다. 왕정은 제도의 이름이 아니라 권력관계의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2016년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며 ‘왕정에서 민주로’를 외쳤다. 대통령을 시민의 위임을 받은 공직자가 아니라 왕가의 계승자처럼 바라보는 정치문화를 겨냥한 말이었다.
2026년 8월 24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유시민 작가는 이재명 대통령이 특정 여당 대표 후보를 지지했다는 주장과 관련해 ‘왕정’이라는 말을 꺼냈다. 대통령이 당대표를 골라 당선시키려 하는 것은 공화정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취지의 비판이다. 이 발언이 있었다는 사실과 대통령의 구체적인 관여 정도가 입증됐는지는 구분해야 한다.
서로 다른 시기와 정치세력을 향해 같은 말이 반복됐다는 것은 왕정적 정치문화가 어느 한 진영만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보수의 왕정은 안보·질서·국가를 내세우고 진보의 왕정은 국민주권·개혁·민주를 내세울 수 있다. 사용하는 명분은 다르지만 한 지도자의 의지가 정당과 국회, 사법부와 시민 위에 놓인다면 본질은 같다.
민주공화국의 시민은 권력자를 선택하고 감시하며 교체한다. 왕정의 신민은 권력자의 은혜를 기다리고 충성을 바치며 보호를 요청한다. 민주주의에서 시민이 지켜야 할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헌법이다. 대통령은 시민이 보호해야 할 군주가 아니라 시민의 감시를 받아야 할 공직자다.
민주당에 민주가 있는가
더불어민주당은 공식 강령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국민주권을 선언한다. 따라서 정책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민주당을 북한식 인민민주주의 정당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인민민주주의’는 역사적·이념적으로 매우 무거운 개념이다.
비판은 당명이 아니라 행동을 향해야 한다. 공식 강령의 선언과 현실 정치의 실천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국회 다수 의석을 국민으로부터 받은 무제한적인 명령처럼 사용하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경우에만 국민주권을 내세우고 있지 않은지, 사법부와 독립기관의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도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지 물어야 한다.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과 시민을 반민주 세력으로 몰아붙이지 않는지도 보아야 한다.
특정 시민단체와 운동세력을 시민사회 전체의 대표처럼 인정하면서 조직되지 않은 평범한 시민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있지 않은지도 점검해야 한다. 자기편의 위법과 거짓에는 침묵하면서 상대편에만 법과 정의를 요구한다면 민주라는 이름은 진영의 무기가 된다.
시민이 없는 시민운동이 허구이듯 민주가 빠진 민주당도 이름과 실체가 어긋난다. 민주라는 간판을 달고 자유와 법치, 권력분립과 다원성을 훼손한다면 그 이름은 더 이상 민주적 실천을 보증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를 판단하려면 법안과 결정, 발언과 절차를 구체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당명만으로 면죄부를 줄 수도, 혐의를 확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민주당이 민주를 왜곡한다고 해서 보수가 민주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민주당에 대한 반감이 민주라는 가치에 대한 혐오로 변하는 순간 보수는 자신이 지켜야 할 헌법질서까지 상대에게 넘겨주게 된다.
오늘의 보수는 왜 민주를 멀리하게 됐는가
오늘의 보수 일부가 민주라는 말을 불편해하는 이유에 대해 나는 다섯 가지 해석을 제안한다. 모든 보수 지지자의 생각을 조사한 결과가 아니라 정치언어를 둘러싼 경향에 대한 분석이다. 첫째는 ‘민주’가 특정 정당과 진보진영의 정치적 브랜드처럼 인식된다는 점이다. 민주당에 대한 반감이 민주라는 가치에 대한 거리두기로 번질 수 있다.
두 번째는 민주화의 역사가 진보진영만의 역사처럼 서술됐기 때문이다. 보수는 산업화와 안보를 담당했고 진보는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이분법이 굳어졌다. 보수는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자신의 역사와 철학을 충분히 발굴하지 못했고, 권위주의 시대에서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과 단절할 것인지도 분명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민주주의의 왜곡을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다수 의석의 횡포와 포퓰리즘, 거리의 압력정치와 선동적 여론을 경험하면서 일부 보수는 민주를 머릿수의 정치로 여기게 됐다. 그러나 다수의 폭주는 민주주의의 본질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병든 모습이다. 병든 민주가 싫다고 민주 자체를 버리면 권위주의만 남는다.
네 번째는 보수가 시민보다 국가와 지도자를 앞세워온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안보·질서·성장·통치능력을 강조하는 동안 시민의 참여와 지방자치, 자율적 결사와 권력 감시는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됐다. 보수의 중심에 있어야 할 자유롭고 책임 있는 개인은 약해지고, 국가를 운영하는 엘리트와 강한 지도자의 역할만 부각됐다.
다섯 번째는 자유를 민주와 분리했기 때문이다. 보수는 자유를 시장과 경제활동의 언어로 좁혔고, 진보는 민주를 참여와 평등의 언어로 독점했다. 그 결과 보수의 자유는 강자와 기업만을 위한 자유처럼 비쳤고, 진보의 민주는 집단의 의지를 앞세우는 정치로 기울었다.
보수는 민주를 진보에 빼앗긴 것이 아니다. 스스로 민주를 자신의 철학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 그 해석권을 넘겨주었다.
진보는 조직을 만들고 보수는 왕을 기다린다
한국의 진보진영은 오랫동안 학생운동, 노동조합, 시민단체, 지역조직과 사회운동을 통해 사람을 발굴하고 훈련해 왔다. 한 사람이 선거에 나설 때 그 뒤에는 인적 네트워크와 조직, 공동의 언어와 정책 의제가 따라붙는다. 누구를 지도자로 세우든 자신들의 이해와 노선을 대변할 사람을 조직이 찾아내는 구조다. 물론 이는 두 진영 전체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다. 진보에도 개인 중심 정치가 있고, 보수에도 축적된 조직과 인재 육성의 경험이 있다. 여기서는 보수의 구원자 정치와 대비해 드러나는 조직적 경향을 살피려는 것이다.
이 구조에는 심각한 위험도 있다. 폐쇄적인 운동권 인맥이 권력 카르텔이 될 수 있고, 특정 시민단체와 노동조합의 이해가 시민 전체의 뜻으로 포장될 수 있다.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이 시민을 대표하는 정치인보다 우선될 수도 있다. 진보의 문제는 조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시민을 대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반면 보수는 사람을 길러내는 조직보다 위기를 단번에 해결할 영웅을 기다리는 경향이 강하다. 선거가 다가오면 “누가 우리를 구해줄 것인가”를 묻는다. 정당의 철학과 정책, 후보의 정치 경험과 검증된 능력보다 상대 진영을 한 번에 꺾을 강력한 인물을 찾는다.
기존 정치권과 거리가 멀수록 신선하다고 평가하고, 정치 경험이 부족한 것을 오히려 장점으로 받아들인다. 언론과 여론조사에서 이름이 급부상하면 그 사람에게 보수 전체의 운명을 맡긴다.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이다.
시민은 지도자를 선택하지만 신민은 자신을 구원할 왕을 기다린다.
정치 경험이 없다는 것은 기존 정치의 잘못에서 자유롭다는 뜻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민주정치를 운영해본 경험도 없다는 뜻이다. 타협하고 설득하는 능력, 당내 반대를 견디는 태도, 의회와 사법부를 존중하는 습관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보수는 정당 안에서 오랫동안 정책을 만들고 선거와 의정을 경험하며 실패에 책임져온 정치인을 낡은 인물로 취급해 왔다. 반면 정치철학과 통치능력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유명인을 ‘새로운 얼굴’과 ‘강한 리더십’이라는 이유로 정상에 올렸다.
이 구조에서는 같은 순환이 반복된다. 기존 정치에 실망하고, 정치권 밖의 인물을 발견하고, 검증되지 않은 인물에게 진영 전체의 희망을 건다. 선거 승리를 위해 내부의 비판을 중단하고, 집권하면 지도자를 중심으로 궁정정치가 형성된다. 실패하면 모든 책임을 한 사람에게 돌린 뒤 다시 더 강한 새로운 왕을 찾는다.
보수의 인물난은 사람이 없어서만 생긴 것이 아니다. 왕을 찾느라 정치인을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생겼다.
‘윤어게인’, 왕 찾기 정치의 극단
‘윤어게인’은 지도자의 실패 이후에도 정치가 그 인물의 복귀 요구에 묶이는 극단적인 징후라고 이 글은 평가한다. 2025년 4월 8일 YTN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이후 그의 재등장을 뜻하는 피켓과 일부 지지자의 헌법재판소 결정 불복 움직임을 보도했다. 구호의 존재는 확인되는 사실이며, 그것을 왕 찾기 정치로 해석하는 것은 이 글의 판단이다.
물론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동기를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다. 탄핵 절차에 대한 의문, 민주당에 대한 반감, 언론과 사법기관에 대한 불신, 안보와 국가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함께 작용했을 수 있다. 참여자 모두를 개인숭배자로 낙인찍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윤석열이라는 한 정치인의 복귀를 자유대한민국의 회복과 동일시하는 정치적 구조는 분명히 비판해야 한다. 대통령과 대한민국은 같은 존재가 아니다. 자유대한민국은 어느 정치인이 만들거나 소유하는 나라가 아니다.
왕 찾기 정치의 마지막 단계는 왕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적 판단의 실패는 음모가 되고, 책임을 묻는 절차는 박해가 되며, 몰락한 지도자는 순교자로 바뀐다. 지도자를 비판하는 사람은 자유대한민국을 배신한 사람이 된다.
정치는 검증의 영역에서 신앙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과 민주당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것은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 어느 한쪽을 비판하기 위해 반드시 다른 한쪽에 충성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진영정치가 만든 감옥이다. 시민에게는 두 권력을 동시에 비판할 자유가 있다.
윤어게인은 보수를 되살리는 운동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보수의 갱신을 지연시킨다. 실패의 원인을 성찰하지 못하게 하고 새로운 지도자와 정책이 성장할 공간을 막기 때문이다. 보수의 미래는 실패한 왕을 다시 세우는 데 있지 않다. 누구도 왕이 될 수 없는 정당과 정치질서를 만드는 데 있다.
민주를 잃은 보수는 무엇을 보수하는가
진정한 보수라면 민주를 정치철학의 근본에 놓아야 한다.
보수가 지켜야 할 것은 특정 정권과 지도자, 기득권과 과거의 권위가 아니다. 보수가 지켜야 할 것은 시민이 주권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오랜 시간 형성된 헌법과 제도, 법치와 권력분립, 사법부 독립과 언론의 자유, 복수정당제와 지방자치다.
이 모든 것이 민주주의의 토대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면 보수가 보수해야 할 제도도 사라진다.
씨앗이 지향하는 입헌적 보수주의는 인간과 권력의 불완전함을 인정한다. 아무리 선한 목적을 내세우는 권력도 잘못될 수 있고, 유능한 지도자도 타락할 수 있다. 그래서 권력을 나누고 법으로 제한하며 축적된 제도와 규범을 통해 폭주를 막는다. 역사상의 모든 보수주의가 민주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늘의 보수가 선택하고 지켜야 할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보수가 민주를 근본에 놓는다는 것은 다수결을 숭배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수의 권력까지 제한하는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뜻이다. 시민 한 사람의 자유를 보호하고, 권력을 분산하며, 반대자를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고, 자신이 지지하는 세력의 패배와 평화적 정권교체까지 받아들이는 정치다.
진정한 보수는 민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권력의 오만을 경계하는 사람이야말로 민주를 가장 적극적으로 말해야 한다.
민주를 되찾는다는 것
민주를 되찾는다는 것은 민주라는 단어를 진보의 소유에서 보수의 소유로 옮기는 일이 아니다. 민주를 또 다른 진영의 깃발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진짜 민주이고 상대는 가짜 민주다”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민주를 되찾을 수는 없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도 민주를 진영의 도구로 사용하는 잘못을 반복하게 된다. 우리 편의 권력에도 상대편과 똑같은 기준을 적용할 때 비로소 진짜 민주를 말할 수 있다.
우리 편 대통령의 권력도 제한해야 한다. 우리 편 정당의 다수 의석도 견제해야 한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언론의 자유도 지켜야 한다.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시민에게도 동일한 권리와 존엄을 인정해야 한다. 법은 내 편과 상대편에게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민주의 진정성은 다음 질문에서 드러난다.
반대자의 자유를 인정하는가. 다수의 권력에도 한계를 두는가. 법을 내 편과 상대편에게 똑같이 적용하는가. 사법부와 언론의 독립을 존중하는가. 자신의 패배와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받아들이는가.
민주는 지도자를 따르는 충성이 아니다. 시민이 지도자를 선택하고 비판하며 교체할 수 있는 권리다. 민주는 광장에 더 많은 사람을 모으는 능력도 아니다. 광장에 나오지 않은 시민과 반대편 광장에 선 시민의 권리까지 함께 지키는 질서다.
민주는 특정 시민단체가 시민을 대신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다. 시민단체는 시민의 목소리를 연결할 수 있지만 시민을 대체할 수는 없다. 시민이 없는 시민운동이 허구이듯, 자유로운 개인이 사라진 민주주의도 허구다.
민주화 다음은 시민화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민주화를 이루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시민화다.
민주화가 국민에게 투표권과 정치적 선택권을 돌려주는 과정이었다면, 시민화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와 정당, 지도자와 시민단체에 종속되지 않는 주권자로 성장하는 과정이다. 민주화가 권위주의적 왕을 끌어내리는 일이었다면 시민화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왕과 신민의 관계를 지우는 일이다.
민주가 나라의 엔진이라는 것은 모든 정책을 국민투표로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을 권력의 주인으로 대하는 원리가 국가와 정당, 시민사회의 일상적인 작동 방식이 된다는 뜻이다.
대통령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일정 기간 권한을 위탁받은 공직자여야 한다. 국회의원은 대통령과 당 대표의 부하가 아니라 독립된 헌법기관이어야 한다. 야당과 반대자는 국정의 방해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필수 구성원이어야 한다. 시민단체는 시민을 대신하는 권력이 아니라 시민의 자율적인 활동을 돕는 매개체여야 한다.
무엇보다 시민은 국가의 보호와 혜택을 기다리는 신민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주권자가 되어야 한다.
씨앗의 소리는 민주를 이렇게 정의한다.
민주는 시민이 권력의 주인이 되는 질서다. 그러나 그 시민은 하나의 집단으로 뭉뚱그려진 국민이 아니라,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말하며 선택할 자유를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이다.
민주는 내 편이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자유롭게 말하고 경쟁하며, 다음 선거에서 권력을 바꿀 수 있도록 지켜주는 제도다. 민주주의자는 권력자를 숭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권력자도 시민 위에 서지 못하게 막는 사람이다.
민주를 시민에게 돌려주자
민주를 특정 정당의 이름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민주를 권력자의 방패로 사용하게 해서도 안 된다. 민주를 말하면서 권력에 줄을 서고, 권력의 독선을 옹호하며, 반대자를 시민의 자리에서 밀어내는 사람들에게 민주의 이름을 맡길 수 없다.
동시에 민주당에 대한 반감 때문에 민주라는 말 자체를 외면하는 보수도 달라져야 한다. 민주를 포기한 보수는 지켜야 할 헌법질서와 시민의 자유까지 함께 포기하게 된다. 진정한 보수라면 민주를 자신의 근본에 놓아야 한다.
민주는 진보의 소유물이 아니다. 보수의 소유물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가진 사람의 명분이 아니라 권력으로부터 시민을 지키는 공동의 질서다.
이제 민주를 되찾아야 한다.
그러나 한 진영에서 빼앗아 다른 진영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민주를 정당과 지도자, 운동조직의 깃발 아래 두지 말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자유가 빠진 민주는 민주가 아니다. 시민이 빠진 민주도 민주가 아니다. 반대자의 권리를 지키지 않는 민주 역시 민주가 아니다.
민주는 권력자의 깃발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다. 민주는 지도자를 향한 충성이 아니라 권력을 의심할 수 있는 자유다. 민주는 다수의 힘이 아니라 다수의 힘까지 제한하는 질서다.
좋은 왕을 찾는 나라가 아니라 어떤 지도자도 왕이 될 수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가야 할 다음 길이다.
그것이 우리가 되찾아야 할 민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