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언어
기업시민 — 회사도 시민이고, 직원도 시민이다
기업시민은 포스코가 처음 만든 말이 아닙니다. 말의 어원과 학술적 해석, 기업의 실제 사례를 살펴보고, 기업 자체의 책임과 임직원 개인의 자율적인 시민활동을 연결하는 씨앗의 방향을 정리합니다.
핵심 요약
- 포스코는 2018년 기업시민을 경영이념으로 채택했습니다. 국제 학계의 논의는 그보다 오래됐습니다.
- 기업시민은 기부·봉사, 경영 전반의 책임, 시민의 권리에 미치는 영향까지 여러 관점으로 논의됩니다.
- 기업은 본업의 책임을 이행하면서 직원이 직접 선택한 시민활동에 시간·비용·전문성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회사의 이름이 적힌 조끼를 입고 봉사활동에 나선 직원들이 있다. 기업이 비용을 대고, 직원들이 시간을 내고, 지역사회가 도움을 받는다. 기업의 사회공헌에서 익숙한 장면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생각해 보자. 직원이 자기 동네의 문제를 발견하고 직접 해결 방안을 제안한다면 어떨까. 회사가 그 활동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 전문성을 지원한다면 어떨까. 활동의 주제가 회사 홍보 계획과 달라도 시민으로서의 선택을 존중해 준다면 어떨까.
씨앗이 말하는 기업시민은 이 장면까지 포함한다. 기업은 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이며,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도 각자의 판단과 책임을 가진 시민이다.
기업시민이라는 말은 어디서 왔나
기업시민은 영어 corporate citizen, 기업시민성은 corporate citizenship에 대응하는 말이다. 국내에서는 두 표현을 모두 ‘기업시민’으로 옮기기도 한다. 앞의 표현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기업을 가리킨다면, 뒤의 표현은 그 기업이 지녀야 할 자격·책임·행동을 강조한다.
Corporate의 뿌리는 ‘몸’을 뜻하는 라틴어 corpus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조직으로 결합해 활동한다는 의미로 발전했다. Citizen은 도시의 주민을 가리키던 말에서 출발했고, citizenship은 시민의 지위와 권리, 책임을 뜻하게 됐다. 이를 합친 기업시민은 기업을 사회 안에서 권리와 책임을 가지고 활동하는 구성원으로 이해하는 표현이다.
한국에서 이 말이 널리 알려지는 데에는 포스코의 역할이 컸다. 포스코는 2018년 7월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기업시민’을 경영이념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국제 학계에서는 그보다 앞서 기업시민을 논의했다. 아치 캐럴은 이미 1998년 「기업시민의 네 가지 얼굴」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포스코에서 시작된 말로 기억하기 쉽지만, 개념의 역사는 포스코의 채택보다 오래됐다.
확인한 자료만으로 최초의 사용자를 한 사람으로 특정하기는 어렵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기업·사회 관계에 관한 논의가 축적되면서 발전한 개념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학계에서는 기업을 어떻게 시민으로 보나
기업을 시민으로 바라보는 논의의 배경에는 기업의 영향력이 커진 현실이 있다. 기업은 일자리와 상품을 만들고, 기술과 투자를 이끌며, 지역의 생활과 환경에도 영향을 준다. 기업의 결정을 이익과 비용만으로 설명하면 그 결정이 사회에 남기는 결과를 충분히 읽기 어렵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현대적 논의는 하워드 보웬의 1953년 저술을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후 이해관계자 이론은 기업이 주주와 함께 노동자·고객·협력사·지역사회 등 기업 활동에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기업시민 논의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발전했다.
다만 학계에서도 기업시민의 뜻이 하나로 통일돼 있지는 않다. 더크 매튼과 앤드루 크레인은 기존 논의를 구분하고, 시민의 권리까지 살피는 확장된 관점을 제시했다.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매튼과 크레인의 2005년 논문은 특히 시민의 권리 중심 관점을 강조했다. 전통적으로 정부가 보장해 온 사회적 권리, 자유에 관한 권리, 정치적 참여의 권리를 실제로 누리는 과정에 기업이 관여한다는 것이다. 기업이 복지·교육·서비스 제공에 참여하거나, 노동자의 자유와 사회적 발언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을 분석하는 틀이다.
이 관점에서 기업시민은 기업에 붙여 주는 칭찬보다 기업의 영향력에 책임을 묻는 언어에 가깝다. 기업이 사회의 주체라면 무엇을 기여했는지와 함께 어떤 권한을 행사했고, 그 결과를 누구에게 설명하는지도 살펴야 한다.
실제 기업들은 무엇을 기업시민이라고 부르나
포스코가 채택한 기업시민은 사업, 사회, 사람을 함께 다루는 경영이념이다. 포스코엠텍의 설명에는 협력사와의 공정한 거래, 지역사회 문제 해결, 안전한 근무환경과 공정한 인사가 포함돼 있다.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나누는 활동에서 경영 전반의 행동 기준으로 범위를 넓힌 것이다.
한국경제는 2019년 포스코의 기업시민 활동을 소개하면서 협력사 지원, 취업·창업 교육, 지역사회 활동과 함께 임직원의 자발성과 창의를 강조했다. 기업시민을 실천할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 공정한 인사도 그 내용에 들어 있었다.
독일 헨켈은 기업시민을 자발적인 사회적 기여와 연결한다. 직원과 퇴직자의 봉사활동, 사회단체와의 협력, 긴급구호를 주요 영역으로 삼는다. 1998년 시작한 ‘MIT—Make an Impact on Tomorrow’는 직원들의 자발적 사회참여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같은 기업시민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어떤 기업은 경영 전체의 책임을, 어떤 기업은 기부와 봉사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이름을 확인한 다음에는 실제 운영 방식을 살펴야 한다. 누가 활동을 정하고, 직원에게 어떤 선택권이 있으며, 어떤 변화가 남았는지가 그 기업시민의 내용을 보여 준다.
회사 밖에서도 직원은 시민이다
씨앗은 기업시민을 두 층위에서 바라본다.
하나는 기업 자체다. 기업은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고, 일자리와 혁신을 이끌며, 공정한 거래와 안전한 노동환경을 지킬 책임이 있다. 기업가 정신은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위험을 감수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힘이다. 그 힘이 책임 있게 작동할 때 시장과 사회의 신뢰도 자란다.
다른 하나는 기업의 구성원이다. 임직원은 기업의 생산과 성장을 담당하면서 각자의 생활세계에서는 이웃이자 시민으로 살아간다. 회사에서 쌓은 기술과 경험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
회계 담당자는 작은 공익단체의 회계를 도울 수 있다. 기술자는 지역 시설의 안전 문제를 살필 수 있다. 개발자는 시민에게 필요한 정보 도구를 만들 수 있다. 직원이 직접 발견한 문제에서 활동이 시작되고, 기업이 그 활동을 지원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것이 씨앗이 강조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기업 구성원 개인의 사회적 책임의 연결’이다. 기업이 구성원의 시민적 역량을 키우고, 구성원은 그 역량을 사회에 돌려주는 관계다.
자율적인 시민활동을 지원하는 사례
세일즈포스는 직원에게 매년 7일, 56시간의 유급 봉사 시간을 제공한다. 직원은 회사가 지원하는 비영리단체와 함께 활동하거나 자신이 선택한 단체에서 봉사할 수 있다. 기업이 시간을 마련하고, 직원이 활동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AP가 소개한 보험사 리버티뮤추얼의 사례에서도 직원들의 전문성이 지역의 필요와 연결됐다. 직원들은 취약한 환경의 청년들에게 일 경험을 제공하는 비영리단체 ‘More Than Words’를 장기간 도왔다. 참여 청년들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취업에 앞서 교통과 식사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찾아냈다. 봉사가 현장의 문제를 이해하고 지원 방식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다.
연구도 선택권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2021년 발표된 폴란드 제조기업 사례연구에서는 직원들이 활동을 고르거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할 수 있었다. 연구진은 직원 15명의 면담을 통해 자율성,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경험,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활동의 의미를 만드는 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한 기업의 소규모 연구이지만, 시민활동을 지원하는 제도를 설계할 때 참고할 만한 근거다.
이 사례들에서 배울 점은 직원 개인의 판단을 존중하면서 기업의 자원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참여 인원과 봉사 시간에 더해 시민의 경험과 문제 해결 능력이 쌓이는지를 보아야 한다.
CSR·ESG·기업시민은 어떻게 연결되나
세 용어는 서로 겹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초점을 나누면 다음과 같다.
ESG 논의는 환경·사회·지배구조 문제가 기업의 가치와 투자 판단에 영향을 준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발전했다. 2004년 유엔환경계획 금융이니셔티브의 자료도 이러한 요소를 금융시장과 투자 판단에 반영할 것을 다뤘다.
씨앗의 관점에서 기업시민은 CSR과 ESG를 생활 속 행동으로 연결하는 언어가 될 수 있다. 회사가 책임을 관리하고, 구성원이 그 책임을 이해하며, 각자의 전문성과 자율적인 참여로 사회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것이다.
개인의 사회적 책임도 이 과정에 들어간다. 일터에서 안전과 정직을 지키고, 거래 상대를 존중하며,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는 책임이다. 기업은 개인의 참여를 지원하면서 임금·안전·환경·공정거래 등 회사가 직접 감당해야 할 책임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씨앗이 제안하는 기업시민의 방향
국가·시장·시민사회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움직인다. 기업은 시장의 중심에 있지만,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과 기업이 남기는 영향은 시민사회와 이어져 있다. 시민사회에도 기업의 기술과 경험, 문제 해결 능력이 필요하다.
이 연결을 건강하게 만들려면 구체적인 제도가 따라야 한다.
첫째, 직원이 활동을 제안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참여 여부와 의견의 차이가 인사상 불이익으로 이어지지 않아야 한다.
둘째, 기업은 시간과 비용, 교육과 전문성을 지원해야 한다. 시민적 책임을 강조하려면 그것을 실천할 여건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셋째, 시민단체와 지역사회의 독립성을 존중해야 한다. 협력 의제와 지원 기준을 공개하고, 후원을 받는 쪽도 기업의 책임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활동의 결과를 시민의 삶에서 확인해야 한다. 주민의 불편이 줄었는지, 단체의 역량이 커졌는지, 직원의 참여가 지속됐는지 살펴야 한다. 실패와 개선 과정도 다음 활동에 남겨야 한다.
기업의 자유는 투자와 도전, 고용과 혁신을 가능하게 한다. 시민적 책임은 그 자유가 사회의 신뢰 속에서 지속되도록 돕는다. 국가와 시민사회 역시 기업을 책임 있는 협력 주체로 대하고, 자율적인 기여가 자랄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기업시민은 회사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책임 있게 행동하고, 그 안의 사람들이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기업이다.
그 기업을 평가하는 기준도 분명하다. 본업에서 책임을 지켰는가. 직원에게 선택권을 주었는가. 시민의 문제를 함께 해결했는가. 그리고 활동이 끝난 뒤에도 사람과 사회에 남는 것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