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부자는 국경을 넘는다, 한국은 무엇으로 붙잡을 것인가
삼성 일가는 5년간 여섯 차례에 걸쳐 약 12조 원의 상속세를 완납했다. 한 가족이 낸 세금이 2024년 전체 상속세 세수보다 50%가량 많다는 사실은 한국의 상속세가 기업승계와 투자, 일자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 묻게 한다. 세계가 부와 인재를 유치하는 동안 한국은 무엇으로 기업가를 남게 할 것인가.
12조 원을 다 냈다고 논쟁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지난 4월 삼성 일가는 고 이건희 회장의 유산에 부과된 약 12조 원의 상속세 납부를 마쳤다. 2021년부터 5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납부한 금액이다. 12조 원은 2024년 한 해 국가가 거둔 전체 상속세 약 8조 원보다 50%가량 많다.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국민의 의무다. 삼성 일가도 이를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납세가 끝났다고 논쟁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한 가족이 낸 상속세가 국가의 연간 상속세 수입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은 한국의 상속세 체계가 과연 정상적인지를 다시 묻게 한다.
- 한 가족이 낸 상속세가
- 국가의 한 해 상속세 수입보다 많았다.
세계의 부와 기업가는 이미 국경을 넘고 있다
국제 자산이주 분석기관의 2025년 보고서는 전 세계에서 약 14만2000명의 백만장자가 거주 국가를 옮길 것으로 전망했다. 영국 1만6500명, 중국 7800명, 인도 3500명의 순유출을 예상했고, 한국도 2400명이 빠져나가는 세계 네 번째 순유출 국가로 분류했다.
반대편에는 UAE가 있다. 같은 보고서는 UAE가 9800명의 백만장자를 새로 받아들일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은 7500명, 이탈리아는 3600명의 순유입이 예상됐다.
이 숫자는 출입국 당국이 확인한 이민 실적이 아니다. 민간기관이 투자 가능 자산 100만 달러 이상을 보유한 사람의 이동을 추적해 산출한 전망치다. 한국인 백만장자 2400명이 실제로 모두 떠났다는 근거로 쓸 수는 없다. 다만 부와 인재를 둘러싼 국제 경쟁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는 경보로는 읽을 수 있다.
UAE는 문을 열었고, 영국은 문턱을 높였다
부자는 세율만 보고 움직이지 않는다. 치안과 교육, 의료, 정치적 안정, 법치주의, 생활환경도 함께 본다. 그러나 세금은 한 나라가 자본과 기업가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신호다.
UAE는 개인소득세와 상속세를 두지 않고 장기체류 비자를 확대하며 금융·기술 기업을 끌어들였다.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도 해외 자산가에게 별도의 과세제도와 거주 혜택을 제공하며 부와 인재를 유치하고 있다.
영국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2025년 4월 비거주자 세제를 폐지하고 거주기간을 기준으로 해외소득과 국외재산에 대한 과세 범위를 넓혔다. 이 변화만으로 모든 부유층 이탈을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세금과 제도의 예측 가능성이 거주지를 선택하는 핵심 조건이라는 사실은 영국의 논쟁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국의 최고세율 50%, 최대주주에게는 60%까지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다. 상장기업 최대주주의 주식에는 20% 할증평가가 적용돼 실질 최고세율이 60%에 이를 수 있다. 삼성 일가가 납부한 12조 원은 이 제도가 실제 기업승계에 어떤 부담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유족들은 주식을 담보로 대출받고, 일부 지분을 매각하고, 배당을 늘렸다. 2026년 4월에도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이 세금과 대출 상환을 목적으로 신탁한 삼성전자 주식 1500만 주의 매각이 진행됐다. 개인에게 부과된 세금이 기업의 지배구조와 주식 수급, 주주가치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저평가된 상장사 주식을 시장가격이 아니라 자산가치와 수익가치로 평가해 과세하자는 법안도 논의되고 있다. 주가를 낮춰 세금을 줄이는 편법을 막겠다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보다 더 높은 가치를 정부가 계산해 세금을 부과한다면 기업승계의 불확실성은 오히려 커질 수 있다.
부자 걱정이 아니라 일자리와 기회의 문제다
부자와 대기업을 왜 걱정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부의 대물림을 줄이고 조세 형평을 높여야 한다는 반론도 가볍게 볼 수 없다. 상속세 개편은 지배주주의 책임과 소수주주 보호, 투명한 지배구조를 함께 다뤄야 설득력을 갖는다.
그렇다고 기업가가 떠날 때 함께 움직이는 것을 개인의 예금계좌로만 볼 수도 없다. 투자자본과 본사 기능, 전문인력, 거래기업, 새로운 사업 기회도 움직인다. 세율은 한 사람의 부담에서 끝나지 않고 기업의 투자 판단과 협력업체의 일감, 청년의 일자리로 번진다.
자본에는 국적이 있지만 발에는 국경이 없다. 기업가에게 애국심을 요구하면서 기업하기 어려운 제도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 부유층의 이탈을 모두 세금 탓으로 돌리는 것도 옳지 않지만, 세금과 규제가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외면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
- 자본에는 국적이 있지만
- 발에는 국경이 없다.
세율·납부 방식·기업지배구조를 함께 고쳐야 한다
상속세를 낮추자는 주장은 세금을 없애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고세율을 국제 경쟁이 가능한 수준으로 조정하고, 기업을 해체하거나 지분을 급히 매각하지 않고도 세금을 낼 수 있도록 납부 방식을 현실화하자는 것이다. 가업승계를 특혜가 아니라 고용과 기술, 거래관계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
동시에 기업승계 과정에서 경영권을 유지하려는 지배주주가 소수주주의 이익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이사회 책임과 공시, 주주권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 세율을 낮추는 대신 불투명한 지배구조까지 눈감아 주자는 거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국회가 확인할 기준은 분명하다. 상속세 때문에 실제로 얼마나 많은 지분 매각과 본사 이전, 투자 축소가 일어나는지 공식 통계를 쌓아야 한다. 세율과 공제, 연부연납과 물납 제도가 기업의 존속과 세수에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도 공개해야 한다. 전망치와 구호가 아니라 실제 이동과 투자, 고용과 세수로 제도를 평가해야 한다.
떠나는 부자를 비난하는 것은 정책이 아니다
상속세를 많이 걷는 것과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세율은 높지만 기업이 떠나고 일자리가 줄어든다면 그 부담은 결국 청년과 근로자, 협력업체가 나누어 지게 된다. 반대로 기업과 인재가 들어오면 투자와 고용이 늘고 세원도 함께 커진다.
세계는 이미 부와 인재를 둘러싼 경쟁에 들어갔다. 어느 나라는 문을 열고, 어느 나라는 세율을 낮추고, 어느 나라는 기업가가 오래 머물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한국만 부의 이동을 도덕의 문제로 다룰 수는 없다.
떠나는 부자를 비난하는 것은 정책이 아니다. 들어오게 만들고, 남고 싶게 만드는 것이 정책이다. 한국이 만들어야 할 나라는 부자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기업가가 도전하고 투자할 수 있으며, 그 도전이 청년의 일자리와 시민의 기회로 이어지는 나라다. 부와 인재가 빠져나간 뒤에는 나눌 파이도, 걷을 세금도 남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