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자살을 정신병으로 보는 정부
사람이 삶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는데, 남은 사회가 그 사람의 정신만 들여다보고 있다면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상담 이후의 삶은 누가 지키는가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견디기 어려운 시간을 혼자 버티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남겨진 가족은 왜 그랬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답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 앞에서 정부는 상담을 늘리고, 치료를 강화하고, 위험군을 관리하겠다고 말한다. 총리실이 나서고 관계부처가 모여 국가 차원의 대응을 발표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답답한가. 사람의 삶을 보겠다는 말보다 사람을 관리하겠다는 말이 먼저 들리기 때문이다. 삶이 무너진 이유는 수없이 다른데 대책은 다시 정신건강과 상담, 치료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오랫동안 반복된 이 대응의 틀을 보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살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모두 정신질환자였는가. 남겨진 가족들은 상담과 치료를 받으면 그만인가.
이 질문은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을 낮추려는 말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질환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빚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 일터에서 밀려난 사람, 폭력과 모욕을 견딘 사람, 돌봄에 지쳐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끝까지 살폈느냐는 질문이다.
우울증 진단이 있었다고 해서 그를 절망하게 만든 현실까지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진단명이 그 사람의 생애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일본은 삶의 문제로 넓혔는데
일본의 자살대책에는 생활곤궁자 지원, 청년의 직업적 자립, 아동학대와 가정폭력 대응, 노동환경, 유족 지원과 지역 활동이 함께 들어 있다. 자살예방을 위해 사람의 삶을 어디까지 살피고 있는지가 보인다.[1]
일본은 자살대책을 살아가기 위한 포괄적 지원으로 발전시켰다. 지방정부마다 지역계획을 세우고, 중앙정부는 교부금과 전문적 지원을 연결했다. WHO의 2024년 설명에 따르면 기초 지자체의 95% 이상이 지역 자살예방계획을 수립해 실행하고 있었다.[2]
일본에도 정신과 치료와 상담이 있다. 그러나 그 곁에 생활을 지탱하는 여러 정책과 지역의 역할을 놓았다. 의료가 담당할 일을 하면서 다른 영역도 자기 책임을 맡는 구조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부처의 업무 경계가 먼저 보인다. 복지부는 복지부의 사업을 하고, 다른 부처는 협조기관으로 이름을 올린다. 위기에 놓인 사람은 한 명인데 도움을 받으려면 여러 기관의 문을 따로 두드리는 구조가 남아 있다.
정부도 이제 그 한계를 인정한다. 올해 10월 확정한 제6차 자살예방기본계획은 단일부처 중심 대응과 근본요인 해소 노력 부족, 지자체·민간 협력 부족을 기존 계획의 한계로 적었다.[3]
그 문장이 반갑기보다 안타깝다. 그동안 현장에서 얼마나 오래 같은 이야기를 해왔는가. 사람은 병원 안에서만 살아가지 않는다고, 상담 이후의 생활이 이어지지 않으면 위기는 돌아온다고 말해왔다. 수많은 죽음을 겪고서야 정부 계획에 그 한계가 다시 적힌 것이다.
예산의 크기에는 보는 방향이 담겨 있다
일본과 한국의 예산을 같은 이름의 사업 몇 개로 맞춰 비교하면 이 차이를 놓치기 쉽다.
일본의 자살대책 관련 예산을 폭넓게 살피면 생활곤궁자 자립지원과 청년·가족·노동 분야까지 연결된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한 금액 차이보다 국가가 자살대책으로 감당하려는 범위다.[1]
어느 한 부처의 작은 예방사업으로 보는가. 여러 정책이 함께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과제로 보는가. 그 출발점이 다르면 예산의 규모와 쓰임도 달라진다.
한국에서는 수백억 원의 자살예방 예산이 편성돼도 현장의 독립적인 민간 활동에 열린 몫은 작다. 올해 민관협력 공모는 약 10개 기관에 기관별 5천만 원 안팎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선정일부터 11월 말까지 사업을 마치는 일정이다.[4]
사람이 마음을 여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공모 일정에 맞춰지지 않는다. 위기를 견디는 사람에게 필요한 관계도 회계연도가 끝났다고 멈출 수 없다. 그런데 현장단체는 매년 사업비를 기다리고, 사람을 붙잡아 둘 인건비를 걱정한다.
국가는 지속적인 돌봄을 말하면서 그 돌봄을 이어갈 사람들의 지속성은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가.
생명을 지키는 일이 기관의 일이 되어버렸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의 초대 이사장은 정신의학 전문가였고, 올해 취임한 제2대 이사장은 보건복지부 고위 관료 출신이다.[5][6]
이들의 경력만으로 개인의 능력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책의 중심에 어떤 경험과 언어가 놓여 있는지는 살필 수 있다. 의료와 행정의 언어가 중심을 차지할 때, 그 바깥에서 사람을 만나온 이들의 경험은 어디에 놓이는가.
생명을 지키는 일이 부처와 전문가들만의 밥그릇처럼 굳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개탄이 드는 이유다. 현장에서는 사람이 부족하다고 호소하는데, 정책을 설명하고 사업을 관리하는 체계는 계속 존재한다. 시민단체는 사업 수행기관으로 불리고, 당사자와 유족은 의견을 듣는 대상으로 머물기 쉽다.
자살예방만큼 민간의 신뢰와 관계가 중요한 분야가 또 있을까.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반드시 공공기관부터 찾아가지 않는다. 오래 알고 지낸 이웃에게 말을 꺼낼 수 있고, 시민단체 활동가나 종교인에게 겨우 속내를 털어놓을 수도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정해진 절차를 안내하는 데서 끝나는 관계가 아니다. 도움을 거절한 뒤에도 다시 안부를 묻고, 다른 지원을 함께 찾아줄 사람이다.
정책은 그런 관계가 끊기지 않도록 뒷받침할 때 힘을 갖는다. 현장을 국가사업의 형식에 맞추는 것만으로는 신뢰를 만들 수 없다.
종교계와 지역사회를 곁에 세우는 방식
종교계와의 협력도 같은 문제다. 협약을 맺고 행사에 참석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지역의 사찰과 교회, 성당에서 사람을 만나는 이들이 위기 대응에 필요한 교육과 자문을 받고 있는가.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할 때 곧바로 연결할 수 있는가. 치료를 마친 뒤에는 다시 지역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
종교기관이라고 모두 준비돼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교육과 전문기관의 지원, 당사자의 신앙과 선택을 존중하는 협력이 중요하다.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도 편하게 도움을 청할 길이 열려 있는 관계망이다.
지방정부가 맡을 일도 여기에 있다. 보건소에 업무를 얹고 협의체 명단을 만드는 수준으로는 부족하다. 중앙정부의 재원을 지역의 필요와 연결하고, 고용·주거·채무·돌봄 담당 부서와 민간단체가 함께 한 사람을 지원할 수 있는 실행체계가 관건이다.
교부금은 중앙의 사업을 지역에서 대신 집행하는 돈을 넘어, 지역이 자기 주민을 지킬 역량을 갖추는 재원이 될 수 있다. 그 돈으로 현장에 사람이 남고, 경험이 쌓이고, 내년에도 같은 자리에서 주민을 만날 수 있을 때 협력은 실체를 갖는다.
남겨진 가족도 살아갈 사람이 있다
유족에게는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끊긴 소득과 남겨진 채무, 돌봄과 행정절차, 주변의 시선이 한꺼번에 닥칠 수 있다. 이유를 찾지 못한 죄책감 속에서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상담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상담을 받았다는 기록으로 지원이 끝날 수는 없다. 누가 생활의 문제를 함께 풀었는지, 혼자 남겨지지 않았는지가 중요하다.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필요한 존중도 같다. 그를 위험군이나 통계 한 줄로만 남기지 않는 일이다. 무엇을 견디고 있었고 어떤 도움을 만나지 못했는지 살펴, 다음 사람의 삶에서 같은 공백을 줄이는 일이다.
정부는 올해 1~7월 자살사망자가 전년 같은 기간보다 12.3% 줄었다고 발표했다. 그 감소가 오래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숫자가 내려갔다고 이 질문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3]
상담 이후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치료를 마친 뒤에도 혼자였는가. 유족의 생활은 누가 살폈는가. 지역의 활동가는 다음 해에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가.
총리실까지 나서 국가 차원의 대응이라고 말한다면, 그 무게는 이런 질문의 답에서 드러난다. 부처의 경계를 넘는 돈과 권한, 현장을 믿고 맡기는 협력, 사람이 살아가는 조건의 변화다.
사람이 삶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는데, 남은 사회가 그 사람의 정신만 들여다보고 있다면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자살예방의 중심에는 관리할 대상이 아니라 살아갈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