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소리

칼럼

서비스는 늘었는데 시민의 자리는 왜 줄었나

제도와 서비스가 늘어나는 동안 시민이 자신의 삶과 공동의 문제를 판단하고 결정할 자리도 넓어졌는지 살펴봅니다.

서비스와 시민의 자리

동네에 혼자 사는 어르신을 위한 돌봄사업이 생겼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청은 예산을 편성하고, 수행기관은 도시락과 안부 전화를 제공하며, 담당자는 지원받은 인원과 서비스 횟수를 기록합니다.

어르신에게 필요한 도움이 전달되었다면 반가운 일입니다. 가족이나 이웃의 선의에만 맡겨두었던 돌봄을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어르신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도시락이 아니라 병원에 함께 갈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정해진 시간에 걸려 오는 전화보다 이웃과 가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더 필요했다면 그 이야기는 어디에 담길까요.

지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사업계획서에 적힌 목표도 채웠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작 도움을 받는 사람의 삶과 생각은 사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앞선 4편](https://seedvoice.kr/columns/seed-thought-04-public-interest)에서 우리는 공익이란 이름으로 진행되는 사업에 누가 참여하고 누가 책임지는지 살펴봤습니다. 이번에는 그 질문을 시민에게로 가져와 보려 합니다. 제도와 서비스가 늘어나는 동안, 시민이 자기 삶과 공동의 문제를 결정할 자리는 함께 넓어지고 있을까요.

신청서는 많아졌지만, 의견을 낼 자리는 있는가

우리는 생활 속에서 수많은 공공서비스를 만납니다. 돌봄과 주거, 교육과 일자리, 건강과 안전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지원을 신청하고 안내받습니다. 이런 서비스는 시민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반입니다.

문제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이 시민을 언제나 ‘신청하는 사람’으로만 남겨둘 때 생깁니다. 필요한 것을 말하기 전에 정해진 항목부터 골라야 하고, 자신의 사정이 어느 항목에도 들어맞지 않으면 지원받기 어려워집니다.

사업을 설계한 사람은 시민의 필요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책상 위에서 만든 기준이 서로 다른 삶의 사정을 모두 담을 수는 없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연령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필요한 도움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민이 사업을 이용한 뒤 만족도를 표시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의 목적과 방식이 적절한지, 예산이 다른 곳에 쓰이는 편이 더 나은지, 지원받는 당사자가 처음부터 물을 수 없다면 선택지는 이미 좁혀져 있습니다.

신청할 수 있는 권리와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모두 중요합니다. 시민의 자리를 넓힌다는 것은 이 두 권리가 함께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도움을 받는 것과 판단을 맡기는 것은 다릅니다

공적 지원을 받는 시민을 의존적인 사람으로 보는 시선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아플 때 치료받고, 어려울 때 필요한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시민의 권리입니다. 세금을 내고 함께 만든 제도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작동하는 것은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씨드가 살피는 것은 지원을 받느냐의 여부가 아닙니다.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도 자기 삶에 대해 말하고 선택하며, 부당한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느냐입니다.

돌봄을 받는 어르신이 원하지 않는 방문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거 지원을 받는 청년이 자신의 생활 조건과 맞지 않는 규정에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장애인 당사자가 자신에게 필요한 이동과 활동의 방식을 직접 설명하고, 그 의견이 정책에 반영될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불편을 말했을 때 지원이 끊기지 않을까 걱정해야 한다면, 시민은 자신의 권리를 충분히 행사하기 어렵습니다.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절차가 서류에 적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민이 그 절차를 알고, 실제로 이용하고, 처리 결과를 설명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국가는 시민의 삶을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동시에 시민은 국가가 제공하는 도움을 고마워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제도의 방향과 운영을 묻는 주권자입니다.

시민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작아지는가

시민의 자리가 줄어드는 모습은 늘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회의와 설명회, 설문조사와 참여 프로그램이 많아지는 가운데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주민을 초청한 자리가 열려도 사업의 큰 방향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주민에게 남는 역할은 마련된 계획에 의견을 덧붙이는 정도일 수 있습니다. 의견을 제출해도 어떤 검토가 이루어졌고 왜 반영되거나 반영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면 다음 참여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참여하는 사람이 언제나 같은 이들로 좁혀지는 것도 살펴야 합니다. 평일 낮 회의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과 일을 비우기 어려운 사람, 제도에 익숙한 사람과 정보를 얻기 어려운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두 사람의 의견을 들었다고 해서 그들이 해당 지역이나 집단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당사자 안에도 다른 사정과 의견이 있습니다. 시민의 목소리를 듣겠다면 누가 초대되었는지만큼 누가 빠졌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시민의 참여는 행사장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정보를 미리 받고, 다른 의견을 내고, 그 의견에 대한 답을 듣고, 필요한 경우 결정을 다시 살필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집니다.

시민을 크게 만든다는 것

씨드가 말하는 시민은 모든 정책을 공부하고 모든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하고, 가족을 돌보고, 자신의 삶을 꾸려가면서도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에 관해 알고 싶을 때 알 수 있고, 말하고 싶을 때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시민을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만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정보는 이해하기 쉬워야 하고, 질문할 시간과 통로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안전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어야 하며, 잘못된 결정은 고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상의 돌봄사업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어르신과 가족, 돌봄 종사자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묻고, 이용 중에도 지원 내용과 시간을 조정할 수 있게 한다면 어떨까요. 제공기관을 바꾸거나 불편을 신고할 방법을 알리고, 의견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설명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사업이 끝난 뒤에는 도시락을 몇 개 전달했는지만이 아니라 당사자가 원한 도움을 받았는지, 이용을 거절하거나 변경할 수 있었는지, 제기된 불편이 해결됐는지 함께 살필 수 있습니다. 서비스의 양과 더불어 시민의 선택과 발언이 실제로 보장됐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웃의 자발적인 관심도 소중합니다. 다만 주민의 선의가 국가가 책임져야 할 돌봄을 대신하거나, 전문적으로 일하는 사람의 노동을 값없는 봉사로 바꾸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적 책임과 시민의 자율성은 함께 지켜져야 합니다.

산업화와 민주화 다음의 과제

우리 사회는 산업화를 거치며 생활의 기반을 넓혔고, 민주화를 통해 시민이 권력을 선택하고 교체할 길을 열었습니다. 그 성취 위에서 씨드가 제안하는 다음 과제가 시민화입니다.

시민화는 누가 더 훌륭한 시민인지 가르는 기준이 아닙니다. 시민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판단하고, 다른 사람과 공통의 문제를 논의하며, 권력에 설명과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넓혀가는 과정입니다.

선거 때 한 표를 행사하는 것과 일상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이해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이어져 있습니다. 주권은 투표일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동네의 돌봄과 교통, 예산과 공공시설, 학교와 일터에서도 시민의 생각이 존중받아야 합니다.

시민이 작아지는 사회에서는 문제를 발견해도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기 쉽습니다. 반대로 시민의 목소리가 살아 있는 사회에서는 문제를 경험한 사람이 그 경험을 설명하고, 이웃과 나누고, 제도를 바꾸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이 쌓여야 국가도 시민의 삶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씨앗의 소리는 앞으로 정책과 공익사업을 살필 때 예산과 서비스의 규모를 확인하겠습니다. 아울러 누가 처음부터 의견을 냈는지, 빠진 사람은 누구인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지, 시민의 말이 실제 결정에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지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시민이 필요한 도움을 충분히 받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회. 씨드가 말하는 시민화는 그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연재 안내

이 연재는 씨앗의 소리의 바탕이 되는 시민사회 운동론 《S.E.E.D》를 풀어 소개합니다. 시민이 스스로 판단하고 공익의 주체로 성장하는 길을 살펴보고, 씨앗의 기사와 감시, 작은 실천이 어떤 생각에서 출발하는지 설명합니다.

다음 편 예고

⑥ 단체는 커졌는데 시민사회는 왜 약해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