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소리

칼럼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 사회를 찾습니다

국가의 기준과 시장의 선택만으로 시민의 삶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생활을 국가·시장·사회라는 세 관점에서 읽고, 관계와 신뢰 속에서 함께 판단하는 시민의 자리를 살펴봅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취 위에서 씨드가 제안하는 시민화의 과제입니다.

도시락 한 끼에 담긴 세 가지 관계

한 동네에서 혼자 사는 어르신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는 상황을 가정해보겠습니다. 지방정부는 지원 기준을 정하고 예산을 마련합니다. 업체는 음식을 만들어 약속한 시간에 전달합니다. 어느 날 문 앞의 도시락이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이웃이 안부를 확인합니다.

세 사람은 같은 식사 한 끼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행정에는 지원이 제대로 집행됐는지가 중요하고, 업체에는 음식의 품질과 배송이 중요합니다. 이웃에게는 그 음식을 먹어야 할 사람이 오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가 먼저 보입니다.

지원과 배송은 모두 필요합니다. 안부 확인을 유급 서비스로 설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떤 안부를 살펴야 하는지, 당사자가 원하는 도움은 무엇인지, 제도와 서비스가 놓친 사정은 없는지 함께 판단할 자리는 필요합니다. 씨드가 말하는 ‘사회’는 이 관계와 판단의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국가·시장·사회는 같은 삶을 읽는 세 가지 관점입니다

우리는 사회문제를 이야기할 때 국가가 할 일인지 시장에 맡길 일인지부터 나누곤 합니다. 돌봄도 주거도 교육도 이 두 선택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정작 그곳에 사는 시민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무엇을 함께 결정할지는 뒤로 밀리기 쉽습니다.

씨드는 국가·시장·사회를 서로 떨어진 세 구역으로 보지 않습니다. 같은 생활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읽는 세 가지 프리즘으로 봅니다. 국가의 관점에서는 법과 권리, 행정과 예산이 보이고, 시장의 관점에서는 가격과 교환, 생산과 효율이 보입니다. 사회의 관점에서는 관계와 신뢰, 돌봄과 책임, 시민이 함께 판단하는 과정이 보입니다.

학교 앞 작은 가게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가게는 인허가와 안전 기준을 지켜야 하는 사업장이며, 물건을 팔아 수익을 내는 일터입니다. 동시에 아이의 귀가가 늦어진 것을 알아채고, 위험한 골목 이야기가 오가며, 주민들이 서로의 사정을 알게 되는 생활의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이 가게를 국가·시장·사회 중 어느 한 칸에만 넣으면 나머지 모습이 사라집니다. 가게 주인은 규제를 받는 사업자이면서 생계를 꾸리는 시민이고, 이웃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회를 살핀다는 것은 국가와 기업의 바깥에 별도의 공간을 찾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제도와 거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를 함께 읽는 일입니다.

국가의 기준과 시장의 선택이 놓치는 삶

국가는 공통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지원을 담당자의 호의나 친분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같은 조건에는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필요한 권리를 누구나 요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국가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공정한 기준을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삶이 충분히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서류상 가족이 있어도 실제로 돌봐줄 사람이 없을 수 있고, 지원 대상에 해당해도 절차를 이해하지 못해 신청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때 시민사회가 할 일은 무조건 예외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정이 기준에 담기지 않았는지 듣고 확인해 제도의 판단을 다시 묻는 것입니다.

시장도 시민의 삶에 필요한 힘을 제공합니다. 기업은 상품과 기술을 만들고 일자리를 제공하며, 사람들은 거래를 통해 각자의 필요를 충족합니다. 경쟁과 선택이 살아 있어야 시민도 더 나은 품질과 다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구매할 수 있는 선택지가 삶의 선택권 전체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더 비싼 돌봄서비스를 이용해 당장의 어려움을 줄일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선택을 할 형편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더라도 불편한 사정을 설명하고 다른 이용자와 함께 개선을 요구할 힘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의 역할은 국가와 시장 중 하나를 적으로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도는 어떤 경험을 놓쳤는지, 거래의 조건은 누구에게 불리한지, 다른 해법은 가능한지 시민이 함께 살피는 데 있습니다. 기업의 도전과 정당한 수익을 존중하면서도 거래가 이웃에게 미치는 영향을 물을 수 있고, 복지의 권리를 지지하면서도 그 운영이 시민의 말을 듣는지 따질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는 시민단체보다 넓고, 좋은 뜻만으로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사회를 말하면 시민단체부터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공동의 문제를 다루는 자리는 훨씬 넓습니다. 이웃 모임과 직장, 종교공동체와 동호회, 온라인 커뮤니티와 지역의 가게에서도 신뢰와 협력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모였다는 이유만으로 그 관계가 공익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친분이 없는 사람을 배제할 수도 있고, 오래 활동한 사람의 말만 통할 수도 있습니다. 동네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의견을 억누르거나, 돌봄의 책임을 여성과 몇몇 열성적인 주민에게 떠넘길 수도 있습니다.

씨드가 사회를 키우자고 말할 때 이런 관계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여 여부를 스스로 정할 수 있는지, 불편한 의견도 말할 수 있는지, 부담과 보상이 공정하게 나뉘는지 살펴야 합니다.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개인의 자유가 작아진다면 그 관계도 바꿔야 합니다.

시민사회 조직은 이 넓은 관계 속에서 시민의 경험을 듣고 공적인 문제로 연결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습니다. 행정의 답변을 풀어 설명하고, 기업과 주민의 이해가 충돌하는 지점을 정리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검토할 근거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시민의 판단을 조직이 대신할수록 그 역할은 약해집니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이 일상의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모이고 협력하는 능력에 주목했습니다. 고립된 개인들이 자유를 지키려면 서로 힘을 모으는 법을 배워야 하며, 정부가 결사의 자리를 계속 대신하면 시민은 함께 행동하는 능력을 잃고 정부의 도움에 더 의존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1]

씨드는 이 통찰을 오늘의 생활에서 이어가려 합니다. 시민이 함께 문제를 살피고, 의견이 다른 사람과 이유를 주고받으며, 작은 결정을 해보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 경험이 쌓여야 국가와 큰 조직을 상대로도 근거를 요구하고 자기 판단을 지킬 힘이 생깁니다.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시민화의 과제

산업화는 생산과 생활의 기반을 넓혔고, 민주화는 시민이 권력의 구성과 교체에 참여할 길을 열었습니다. 씨드가 그 다음 과제로 제안하는 시민화는 이 성취 위에서 시민 각자가 자기 삶과 공동의 문제를 판단할 힘을 더 키우는 일입니다. 시민의 자격을 심사하거나 정해진 의식을 주입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국가에 필요한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시민의 권리입니다. 그 권리를 행사한다는 이유로 의존적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시민화가 경계하는 것은 도움을 받는 행위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권력이 내 삶의 의미와 선택까지 대신 결정하도록 두는 관계입니다.

첫머리의 도시락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시민이 주체가 되는 돌봄이라면 어르신은 음식을 전달받는 대상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불필요한 방문은 거절할 수 있어야 하며, 서비스에 문제가 있어도 지원이 끊길까 두려워하지 않고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의 관심도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해야 합니다. 주민의 선의로 공공기관의 책임을 메우거나, 전문적인 돌봄노동을 무급 봉사로 대체해서는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국가는 권리를 보장하고, 업체와 종사자는 합당한 대가를 받으며, 주민은 자발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의 말이 실제 결정을 바꾸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씨앗의 소리가 기사와 정책을 읽을 때에도 이 자리를 보려 합니다. 예산이 집행됐는지와 서비스가 제공됐는지를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누구의 경험이 빠졌는지, 당사자가 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는지 함께 살피겠습니다. 지원받은 사람의 숫자에 시민의 목소리가 가려져서는 안 됩니다.

사회는 국가와 시장이 사람을 위해 존재할 수 있도록 붙잡아주는 공공성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살아 있는지는 거창한 선언보다 구체적인 장면에서 확인됩니다. 도움받는 사람이 거절할 수 있는가. 불편을 말한 사람이 답을 들었는가. 함께 논의한 뒤 결정이 달라졌는가. 씨드가 찾는 사회는 시민의 말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공익은 누가 정하고 누가 책임집니까」를 통해 공공성과 공익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연재 안내

이 연재는 씨앗의 소리의 바탕이 되는 시민사회 운동론 《S.E.E.D》를 풀어 소개합니다. 시민이 스스로 판단하고 공익의 주체로 성장하는 길을 살펴보고, 씨앗의 기사와 감시, 작은 실천이 어떤 생각에서 출발하는지 설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