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유능한 국가에도 한계가 필요합니다
시민을 보호하는 국가에는 역량이 필요합니다. 그 역량이 시민의 자유를 압도하지 않도록 권력을 제한하고, 시민의 경험이 정책을 고치는 통로도 열어야 합니다. 씨드가 국가를 평가하는 유능함·제한성·환류의 세 기준을 살펴봅니다.
시민을 지킬 능력과 시민에게 답할 책임
다음과 같은 동네를 가정해봅니다. 큰비가 내리자 위험을 알리는 문자는 신속하게 도착합니다. 그런데 주민들이 여러 차례 알렸던 막힌 배수로는 그대로입니다. 침수 뒤에는 피해 신고와 지원 신청이 빠르게 접수되지만, 왜 사전에 조치하지 않았는지 묻는 질문은 담당 부서를 옮겨 다닙니다.
이 동네에 필요한 국가는 어떤 국가일까요. 위험을 빨리 파악하고 배수로를 정비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누가 어떤 판단을 했는지 설명하고, 잘못이 있었다면 책임을 묻고 고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자를 빨리 보내고 신청서를 많이 처리했다는 사실만으로 국가가 제 역할을 다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국가의 능력과 권력의 한계를 함께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씨드가 지향하는 것은 유능하지만 제한된 국가입니다. 시민을 보호할 힘을 갖추되, 그 힘을 어디까지 행사할 수 있는지 경계가 분명하고, 시민의 경험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고치는 국가입니다.
국가의 크기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
치안이 무너지면 시민은 폭력 앞에 놓입니다. 재난 대응이 늦어지면 생명과 재산을 잃습니다. 계약을 지켜줄 사법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거래와 투자도 불안해집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때 그 부담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먼저 돌아갑니다.
그렇다고 부처와 기관이 늘고 예산이 커졌다는 사실이 곧 국가의 유능함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담당 기관이 여럿인데 책임질 곳은 불분명할 수 있고, 지원사업은 많은데 필요한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조직을 얼마나 늘렸는지와 문제를 얼마나 해결했는지는 따로 살펴야 합니다.
시민의 안전과 권리를 지키는 데 필요한 역량은 갖춰야 합니다. 그 역량이 실제 결과로 이어졌는지 설명할 책임도 따라야 합니다. 국가를 평가하는 출발점은 정부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보다, 맡은 일을 얼마나 제대로 하느냐에 있습니다.
보호할 권한에는 경계가 있습니다
국가는 세금을 걷고, 법을 집행하고, 일정한 행위를 금지할 수 있습니다. 시민의 의사와 달라도 결정을 집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가의 권한은 특별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권한의 목적과 범위, 절차가 제한되어야 합니다.
좋은 목적을 내세웠다고 모든 수단이 허용되지는 않습니다. 안전을 위해 정보를 모으더라도 어떤 정보가 왜 필요한지 설명해야 하고, 기업 활동에 부담을 부과한다면 그 부담이 목적에 비례하는지 따져야 합니다.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결정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며, 그 결정을 다툴 길도 열려 있어야 합니다.
선거의 승리도 이 경계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선출된 권력은 정해진 임기와 권한 안에서 국정을 맡습니다. 그 위임에 사법의 독립을 흔들거나, 비판하는 언론을 억누르거나, 시민의 자율적 활동을 정부의 의도에 맞게 재편할 권한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닙니다.
권력분립과 적법절차는 행정의 속도를 늦추는 장식물이 아닙니다. 시민이 국가를 상대로 자기 권리를 지킬 수 있게 하는 장치입니다. 일이 빨리 진행되더라도 시민이 이유를 물을 수 없고 잘못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 속도는 시민에게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유가 유지되는 좁은 길
아세모글루와 로빈슨은 『좁은 회랑』에서 자유가 국가와 사회 사이의 지속적인 힘겨루기 속에서 유지된다고 설명합니다. 국가가 시민을 보호하지 못해도 자유는 위태롭고, 국가가 사회를 압도해도 자유는 위태롭습니다. 자유를 지킬 국가의 역량과 그 국가를 견제할 사회의 역량이 함께 필요하다는 뜻입니다.[1]
이를 씨드의 관점에서 읽으면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크다고 시민사회가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시민이 자료를 구하고, 제도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과 문제를 검토하며, 권력의 결정에 실질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민단체가 많아져도 시민의 판단을 몇몇 지도부가 대신한다면 그 힘은 충분히 자랐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정부와 가까운 단체만 발언권을 얻고, 다른 의견은 참여의 바깥으로 밀려난다면 견제는 약해집니다. 시민사회의 역량은 조직의 규모와 함께 시민 각자의 자유와 판단 능력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씨드가 시민의 성장을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국가의 역량이 커지는 만큼 시민도 권한의 근거를 읽고, 결과를 확인하고, 다른 선택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민을 잘 보호하는 국가와 시민의 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국가는 함께 만들어져야 합니다.
편리한 행정도 권력을 행사합니다
국가의 힘은 명령과 처벌에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회학자 마이클 만은 국가가 사회 곳곳에서 결정을 실제로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인프라 권력’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국가 지도부가 사회와의 협의 없이 행동하는 전제적 권력과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행정 기반이 잘 갖춰졌다는 사실 자체가 곧 독재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2]
이 구분을 오늘의 생활에 적용해보면, 세금과 복지, 등록과 신청을 연결하는 행정망도 국가의 힘이라는 점이 보입니다. 서류를 반복해서 내지 않아도 되고 지원을 빠르게 받을 수 있다면 시민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동시에 어떤 정보를 연결하고 어떤 기준으로 대상을 나누는지에 따라 시민의 선택과 권리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령 자동으로 처리된 신청에서 잘못된 정보 때문에 제외되었다고 생각해봅니다. 처리 시간이 짧았다는 설명은 그 시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어떤 정보가 사용됐는지 확인하고, 오류를 정정하고, 결정을 다시 검토받을 수 있어야 편리함이 실제 권리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디지털 기술에 반대할 이유가 아니라, 행정을 더 정확하게 설계할 이유입니다. 기술이 시민의 수고를 줄이는 만큼 시민이 설명을 듣고 문제를 제기하는 수고도 줄여야 합니다. 국가가 시민을 파악하는 능력과 시민이 국가의 판단을 이해하는 능력이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시민의 경험이 정책을 고치는 통로
씨드는 국가의 세 번째 조건으로 환류를 생각합니다.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분명합니다. 정책이 시민의 삶에서 어떤 결과를 냈는지 돌아보고, 그 경험을 다음 결정에 반영하는 것입니다.
첫머리의 배수로 사례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주민의 신고에 답변을 보냈다는 사실만으로 절차를 끝낼 수는 없습니다. 위험이 어떻게 분류되었는지, 조치가 미뤄진 이유가 무엇인지, 그 판단이 적절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같은 위험이 반복되지 않도록 업무와 책임을 고치고, 무엇이 달라졌는지 주민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민원을 그대로 정책으로 채택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요구가 충돌할 수 있고, 예산의 제약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 필요한 것이 근거와 설명입니다. 어떤 경험을 검토했고 무엇을 바꿨으며, 받아들이지 않은 요구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지 드러나야 합니다.
간담회를 열고 의견을 받았다는 실적과 시민의 경험이 정책을 바꿨다는 결과는 다릅니다. 시민이 말한 내용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할 수 없다면 참여는 쉽게 일회성 행사로 끝납니다. 환류되는 국가는 잘못을 인정하는 데서 권위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고칠 능력을 통해 신뢰를 얻습니다.
국가를 평가하는 씨앗의 세 기준
이 세 조건은 씨앗의 소리가 법과 정책, 예산과 공공사업을 읽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유능함은 맡은 문제를 해결했는지로, 제한성은 권한의 근거와 시민의 권리가 지켜졌는지로, 환류는 현장의 경험이 다음 결정을 바꿨는지로 살펴보려 합니다.
새로운 기관을 만든다는 발표가 나오면 기존 기관으로 해결하지 못한 이유와 책임 구조를 보겠습니다. 공익을 위한 규제를 제시하면 시민과 기업이 감당할 부담, 다른 수단의 가능성, 이의를 제기할 통로를 함께 보겠습니다. 참여사업을 평가할 때에는 참석자 수와 함께 실제로 수정된 결정과 그 이유를 확인하겠습니다.
시민사회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합니다. 시민을 대표한다는 단체가 누구의 경험을 듣고 있는지, 재원과 의사결정은 공개되는지, 다른 의견을 낸 시민도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국가를 견제하는 조직도 시민 앞에서 책임져야 그 견제가 설득력을 얻습니다.
씨앗이 확인하려는 것은 구체적입니다. 위험을 알린 시민에게 어떤 조치가 돌아왔는가. 권리를 제한한 결정에는 어떤 근거와 검토 절차가 있었는가. 잘못된 정책을 지적한 뒤 실제로 무엇이 바뀌었는가. 시민의 질문에 답하고 그 답을 현실의 변화로 증명하는 국가, 그것이 씨드가 말하는 유능하지만 제한된 국가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 사회의 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행정서비스를 받는 사람, 물건을 사는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시민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연재 안내
이 연재는 씨앗의 소리의 바탕이 되는 시민사회 운동론 《S.E.E.D》를 풀어 소개합니다. 시민이 스스로 판단하고 공익의 주체로 성장하는 길을 살펴보고, 씨앗의 기사와 감시, 작은 실천이 어떤 생각에서 출발하는지 설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