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통령의 언어, 시민의 언어
아이돌의 말끝에는 정치적 낙인이 붙고 대통령은 지지층의 진영 은어를 쓴다. 대통령의 말과 만남에는 지지하지 않은 시민도 들어갈 자리가 있어야 한다. 씨앗은 진영에 붙잡힌 말을 생활의 문제와 시민의 판단으로 되돌리려 한다.
시민의 말, 권력의 말
지난 7월 걸그룹 리센느의 원이는 ‘무섭노’라는 말로 일베식 말투 논란에 휘말렸다. 10월 1일 이재명 대통령은 정부 성과를 정리한 지지자의 글을 공유하며 “많이들 함께 해주세요. 좌아하게 말입니다”라고 썼다.
아이돌의 말끝에는 정치적 의혹이 붙고, 대통령은 지지층의 진영 은어를 직접 사용했다. 개인의 말 한마디를 그토록 엄격하게 따지는 사회에서 대통령의 언어에는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가. 시민에게 들이대는 언어의 잣대는 권력 앞에서 더욱 날카로워야 한다.
‘무섭노’ 한마디에 붙은 정치적 낙인
6월 28일 공개된 영상에서 제작진이 먼저 ‘무섭노’라고 말했고, 원이는 그 말을 받아 조명부터 무섭다는 취지로 답했다. 일베식 표현이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정치권까지 논쟁에 가세했다.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는 사투리와 일베식 ‘노’ 사용을 구별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이준석 대표와 박지원 의원은 말투로 사람을 낙인찍는 데 반대했다. 전 국립국어원장 이상규 교수도 방언의 맥락을 설명하며 말투만으로 사람을 일베로 모는 문제를 지적했다.
조 전 대표는 리센느를 직접 겨냥한 글은 아니었다고 해명하면서도, 자신의 글이 당사자와 팬들에게 상처를 주는 계기로 활용된 데 유감을 밝혔다.
말의 해석에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그럴수록 실제 말과 행동을 살펴야 한다. 말끝에서 사상을 읽어내고 진영의 이름표를 붙이면 일상의 대화는 정치적 심문으로 바뀐다.
진영화된 언어가 무서운 이유다. 한마디가 사람의 평판을 순식간에 위협하고, 해명에 드는 시간과 비용은 당사자에게 남긴다. 지켜보는 사람들도 자기 말을 검열하게 된다. 엉뚱한 편으로 몰릴까 봐 표현부터 조심한다.
대통령은 ‘좌아하게’ 말해도 되는가
‘좌아하게’는 ‘우아하게’의 ‘우’를 정치적 오른쪽인 우(右)로 읽고 좌(左)로 바꾼 말이다. 친명 지지층에서 품격 있게 말하고 행동하자는 뜻으로 사용하는 은어라고 한다.
지지자끼리 주고받을 때에는 친근한 농담일 수 있다. 대통령이 그 말을 쓰면 무게가 달라진다. 대통령의 말에는 지지하지 않은 시민도 들어갈 자리가 있어야 한다.
우아함에 좌우가 있는가. 상대의 말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며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가 어느 진영의 소유인가. ‘좌아하게’는 누구나 지닐 수 있는 태도에 진영의 표시를 붙인다. 알아듣는 우리편과 그 밖의 사람 사이에 경계를 긋는다.
경향신문은 10월 2일 사설에서 ‘좌아하게’가 국민 통합을 추구할 대통령에게 적합하지 않으며 특정 지지층만의 대통령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비판했다.
특정 진영의 대통령이 될 것인가. 좌아를 따지다가 우아한 시민들에게 비판받을 수 있다. 대통령의 품격은 다른 생각을 가진 시민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자기편 단체를 만나면 시민사회와 소통한 것인가
씨앗은 앞서 [「그들이 대한민국 시민사회를 대표하는가」](/columns/do-they-represent-korean-civil-society)에서 9월 4일 대통령의 시민사회 간담회를 비판했다. 공개된 참석 구성이 진보 성향 단체에 기울어져 있었고, 다른 관점의 단체와 조직되지 않은 시민의 참여 통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한국진보연대와 민변, 경실련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대통령은 참석자들이 원하는 세상과 자신이 만들고 싶은 세상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의 의견을 오래 듣는 일은 환영할 만하다. 얼마나 다양한 의견을 들었는지도 중요하다. 대통령과 생각이 비슷한 단체들 밖에도 시민사회는 넓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납세자와 자영업자, 학부모와 지역 주민도 시민이다.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고 어느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어디에서 자신의 말을 전해야 하는가. 초청받은 단체들의 목소리만으로 이들의 삶까지 설명할 수 있나.
만나는 사람과 쓰는 말은 연결된다. 자기편 단체를 시민사회의 대표로 부르고 자기편의 은어로 소통하면, 다른 시민은 자리에서도 말에서도 밀려난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특정 정당의 대표처럼 자기편의 결집을 우선하면서 어떻게 전 국민을 이끄는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나.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수많은 국민에게도 국정의 문을 열고 그들의 비판에 답해야 한다. 사회통합은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말이 바뀌면 책임도 흐려진다
9월 27일 이 대통령은 언론이 외면하거나 유튜버가 조작하는 진실과 사실을 알리는 실천을 강조하며 댓글, SNS 게시, ‘좋아요’ 등을 통한 지지자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9월 30일에는 “모든 언론 기득권자들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고립시키고 왜곡·음해·공격했던 때를 회고했다.
같은 글에서 멸칭과 험한 말을 삼가고 품격 있게 주장하라고 당부한 것은 필요한 주문이다. 그 주문은 대통령 자신의 표현에도 적용돼야 한다. 잘못된 보도에는 어떤 사실이 틀렸는지 밝히고 근거로 반박해야 한다. 언론을 집단적인 공격자로 묶으면 지지자들은 불편한 기사부터 적대행위로 받아들이기 쉽다.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북한 지뢰로 장병들이 다친 사건을 ‘불의의 사고’라고 부른 대목도 대통령의 언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을 보여준다.
뜻밖의 피해를 당한 장병을 위로하는 마음은 담을 수 있다. 동시에 군과 유엔사가 확인한 북한군 매설 지뢰와 정전협정 위반이라는 사실도 말해야 했다. 공격 의도와 세부 경위에 추가 조사가 필요하더라도, 확인된 행위와 책임은 국민에게 설명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 사설은 가해자 없는 피해처럼 들리는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일보도 북한에 사과와 책임, 재발 방지를 요구하지 않은 채 평화를 강조한 기념사가 국민의 심경과 군의 사기에 미칠 영향을 지적했다.
대화를 추진하면서도 우리 장병이 무엇 때문에 다쳤는지 정확히 밝힐 수 있다. 평화를 말할수록 확인된 피해와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정부의 정책 기조에 맞춰 사건을 부르는 말까지 달라지면 시민이 현실을 판단할 기준도 흔들린다.
진영의 언어는 동창회 식탁까지 들어온다
동창회에서 오랜 친구를 만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학창 시절과 가족의 안부를 나누던 자리에 어느 순간 누구를 찍었느냐는 질문이 끼어든다. 정책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너는 그쪽이었구나’라는 말이 나온다. 친구의 사정을 듣기도 전에 정치적 분류가 끝난다.
진보니 보수니, 좌니 우니 편을 가르다가 다음 모임에서는 얼굴도 보지 않는다. 의견 하나가 사람 전체의 됨됨이를 판정하는 표지가 되면 논쟁은 관계의 단절로 번진다. 정치의 편 가르기가 생활에 들어오는 과정이다.
정치인은 경쟁에서 이기면 자리를 얻는다. 시민은 갈라진 뒤에도 같은 동네에서 살고 같은 직장에서 일해야 한다. 정치는 선거에서 이기고 시민은 친구를 잃는다면, 누가 그 비용을 책임지는가.
진영의 언어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보다 ‘누구 편이냐’를 먼저 묻는다. 근거를 보기 전에 상대를 적으로 분류한다. 자기편의 잘못에는 침묵하고 상대편의 실수에는 분노하게 만든다.
상대편을 공격해 박수와 지지를 얻는 정치인은 더 거친 말을 선택하기 쉽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온라인 공간에서는 그 말이 반복되고 분노가 커진다. 정치인은 지지층을 모으고, 시민은 갈라진 관계를 감당한다.
대통령의 말은 국민이 정부와 정책을 판단하는 데 영향을 준다. 자기편의 박수만큼 다른 시민에게 남기는 상처와 불신도 살펴야 한다.
시민의 말에 세운 칼을 권력에도 들이댈 수 있나
남의 말에는 숨은 정치적 의도를 찾아내면서 자기편의 말은 농담과 친근함으로 감싸는가. 반대편 지도자에게 던진 질문을 우리편 지도자에게도 던질 수 있는가. 시민의 말을 엄격하게 판단하는 사회라면 대통령의 진영 언어에는 더욱 엄격한 질문이 따라야 한다.
권력자에 대한 비판이 진영에 대한 배신으로 읽히면 시민은 말을 아끼게 된다. 언론도 사실과 책임보다 자기 독자들의 반응부터 살핀다면 침묵은 더 두꺼워진다. 잘못을 지적할 자유가 소속에 따라 줄어드는 사회에서 시민의 판단은 설 자리를 잃는다.
시민의 언어는 생활의 문제를 함께 푸는 말이다
같은 동네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생각이 달라도 문제를 함께 풀 수 있어야 한다. 시민의 언어는 그 일을 가능하게 한다.
이웃과 주차 문제로 다퉜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 같은 사람들은 원래 그렇다’고 말하면 서로 방어하고 공격하기 바빠진다. ‘차가 통로를 막아서 유모차가 지나가기 어렵다. 어디에 세우면 좋겠느냐’고 말하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보인다. 상대를 분류하던 대화가 해결할 문제를 살피는 대화로 옮겨간다.
정책도 같다. ‘너는 좌파라서 그래’라는 말에는 편 가르기만 남는다. ‘비용은 누가 부담하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실제로 돌아가나’라고 물으면 생각이 다른 사람도 같은 자료를 놓고 따져볼 수 있다.
부당한 일에는 강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시민의 언어는 그 책임을 정확히 겨냥한다. 누가 무엇을 했고, 누구의 권리를 침해했으며,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지 밝힌다. 비판이 구체적일수록 잘못한 사람의 책임은 선명해지고, 관계없는 시민에게까지 번지는 낙인은 줄어든다.
씨앗이 시민언어를 만드는 이유
씨앗의 ‘시민언어’는 진영화된 말을 본래의 뜻과 생활의 자리로 돌려놓고 균형감 있게 살펴보려는 코너다. 말이 가리키는 사람과 행동, 결과를 살피려 한다.
자유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도 보장돼야 한다. 공정은 우리편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때 살아난다. 평화에는 피해의 책임과 재발 방지의 약속이 따라야 한다. 공익을 내세운 국가와 시민단체도 시민 앞에 성과를 설명해야 한다. 이렇게 말의 뜻을 생활 속에서 확인하는 것이 씨앗이 생각하는 균형이다.
반대 시민을 ‘종북’으로 묶든 ‘극우’로 묶든 같은 기준으로 따질 것이다. 실제 행위의 책임을 밝히는 말인가, 다른 의견을 밀어내는 이름표인가. 시민은 누구를 지지하든 사실을 확인하고 잘못을 지적하며 생각을 바꿀 권리가 있다.
씨앗은 대통령이 누구를 만나고 누구에게 문을 열었는지, 비판에 어떤 사실로 답하는지, 피해의 원인과 책임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계속 살필 것이다. 참석자 선정과 정책 반영의 기록, 대통령의 설명과 실제 집행을 함께 확인하겠다.
대통령에게 맡긴 국정에는 시민의 우정과 신뢰를 지킬 책임도 들어 있다. 지지층의 결집을 위해 그 관계를 소모한다면 국민 전체를 이끌 자격부터 의심받게 된다.
좌아하게 응원받는 대통령보다, 다른 생각을 가진 시민에게도 책임 있게 설명하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대통령에게 ‘말을 우매하게 쓰지 말고, 좌매하게도 쓰지 말라’고 한다면, 이 말 역시 리센느의 ‘무섭노’처럼 정치적 낙인의 표적이 될까. 우리 사회가 말의 뜻을 보는지, 말한 사람의 편을 보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