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소리

칼럼

필리핀과 터키, 미국에 등 돌리다

필리핀의 대중 접근은 해양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고, 터키는 나토 회원국으로 남으면서도 F-35 사업에서 배제됐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6조와 일본의 장기침체까지 살피며, 동맹을 약화시키는 선택의 대체 수단과 국민이 치를 비용을 묻는다.

73년 동맹에도 종료 조항이 있다

73년을 쌓아 올린 동맹도 영원한 보증서는 아니다. 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 제6조는 어느 한쪽이 상대방에게 통고한 뒤 1년이 지나면 조약을 종료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통고문 한 장이 그 절차를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안보의 토대에도 끝낼 수 있는 조항이 들어 있다.[1]

그런데도 미국과의 관계가 크게 흔들려도 대한민국은 별 탈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반도체와 조선, 배터리 기술이 있으니 미국도 우리를 어쩌지 못한다고 믿는가. 미국 없이 자주국방을 이루고, 미국 없이 경제자립을 하고, 지금 약속하는 복지까지 그대로 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말에 반대할 국민은 없다. 그 말 뒤에 따라올 청구서를 펼쳐 보인 정치인은 얼마나 있는가. 필리핀과 터키의 경험은 그 청구서를 남의 나라 이야기로 넘길 수 없게 만든다.

필리핀, 중국의 약속은 안보를 대신하지 못했다

2016년 10월,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은 베이징에서 미국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중국에 다가갔다. 중국으로부터 약속받은 차관과 투자 규모는 240억 달러였다. 오랜 동맹과 거리를 두면 중국이 경제적 보상으로 화답할 것이라는 기대가 그 선택을 뒷받침했다.[2]

약속은 현실과 달랐다. 로이터는 2018년 두테르테의 대중 접근 이후에도 약속된 지원 가운데 일부만 실현됐다고 보도했다. 중국과 가까워진 대가로 필리핀이 충분한 경제적 보상을 얻었는지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외교 무대의 악수와 국민의 일자리를 만드는 투자는 같은 것이 아니었다.[2]

남중국해의 갈등도 풀리지 않았다. 중국의 스카버러 암초 통제와 필리핀 어민에 대한 조업 방해는 두테르테 취임 전인 2012년부터 벌어진 일이었다. 두테르테의 친중 노선은 이미 시작된 압박을 끝내겠다는 기대 속에 추진됐지만, 중국의 행동을 바꿀 확실한 지렛대가 되지 못했다. 2016년 중재판정도 중국이 필리핀 어민의 전통적 어업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3]

중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 중국도 우리의 권리를 존중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얼마나 순진한가. 2023년 2월에는 세컨드토머스 암초 인근에서 중국 해경이 필리핀 해경선에 레이저를 사용해 승조원들이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었다는 사건까지 보고됐다. 그달 필리핀과 미국은 방위협력확대협정에 따라 미군이 접근할 수 있는 필리핀 군사시설을 네 곳 추가하기로 발표했다. 두테르테 시기에도 미·필 동맹 자체가 폐기되지는 않았고, 후임 정부는 그 동맹을 다시 강화했다.[4][5][6]

동맹을 밀어낸 자리에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지 필리핀의 경험은 보여 준다. 중국과의 친선 선언만으로 해양에서의 압박을 막을 수 없었다. 강대국의 호의에 기대어 권리를 지키겠다는 외교는, 그 호의가 사라질 때 내놓을 수단이 빈약하다.

터키, 동맹의 간판이 기술 협력을 보장하지 않았다

터키, 곧 튀르키예의 사례는 첨단기술 협력의 문이 어떻게 닫히는지를 보여 준다. 터키는 미국의 반대에도 러시아제 S-400 방공체계를 도입했다. 미국은 2019년 7월 터키를 F-35 전투기 사업에서 배제하는 절차를 발표했다. 100대를 구매할 예정이던 공동개발 참여국도 핵심 기술의 보안을 위협한다고 판단되자 사업에 남을 수 없었다.[7]

2020년 12월에는 미국의 적대세력에 대한 제재법인 CAATSA에 따른 제재가 뒤따랐다. 터키 방위산업청을 대상으로 미국의 수출허가와 금융지원 등에 제한이 가해졌고, 청장 등 고위 관계자 네 명에게 자산동결과 비자 제한이 부과됐다. 국제금융기구의 대출에 반대하도록 한 조치 역시 터키 전체가 아닌 방위산업청을 대상으로 했다.[8]

터키는 나토 회원국 지위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특정 무기체계를 선택한 대가로 최첨단 전투기 협력에서 배제되고 방위산업의 거래와 금융에 제약을 받았다. 동맹의 간판이 남아 있어도 그 안에서 누리던 권한과 기회는 줄어들 수 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이 과정이다.[7][8][9]

터키 경제를 무너뜨린 원인을 미국의 보복 하나로 설명하면 정작 배워야 할 교훈을 놓친다. 국제통화기금은 높은 물가에도 금리를 크게 내린 정책이 리라화에 압력을 가하고 경제의 취약성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2022년 10월 물가상승률은 전년 대비 85%에 이르렀다. 외교의 위험에 경제정책의 오판까지 겹치자 국민의 구매력과 저축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10]

정권은 독자 노선을 선택했다고 자랑할 수 있다. 국민은 오른 식료품값과 떨어진 화폐가치로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한다. 국가의 자존심을 내세운 정치가 국민의 재산을 얼마나 지켜 냈는지까지 물어야 한다.

일본, 산업 강국도 정책 실패의 시간을 잃는다

일본의 장기침체도 함께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때 일본의 제조업 경쟁력은 미국을 위협할 만큼 강했다. 그러나 그 기술력과 자본도 자산 거품의 붕괴와 금융 부실, 뒤늦은 정책 대응의 충격을 막아 주지 못했다. 일본의 장기침체를 미국에 도전한 데 대한 응징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일본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의 분석은 거품 붕괴와 부채 조정, 금융시스템의 취약성을 핵심 원인으로 짚는다.[11][12]

일본에서 읽어야 할 경고는 산업 강국도 정책을 잘못 선택하면 오랜 시간을 잃는다는 사실이다. 지금 잘 만드는 물건이 있다는 이유로 앞으로도 세계시장이 우리를 기다려 줄 것이라고 믿는 순간, 기술에 대한 자부심은 국가 운영의 오만으로 바뀐다.

미국도 손해를 본다는 말로 우리 손해가 줄어드는가

한국의 반도체와 조선, 배터리는 소중한 경쟁력이다. 미국도 한국과의 협력이 흔들리면 비용을 치른다. 그렇다고 그 비용을 양국이 같은 크기로, 같은 시간 동안 감당한다고 볼 근거가 있는가. 상대방도 손해를 본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손해가 견딜 만해지는가.

반도체 공장이 있다고 설계와 장비, 소프트웨어와 고객까지 모두 우리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배를 잘 만든다고 수출시장과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혼자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배터리 기술을 확보했다고 원료와 투자자금, 해외 수요의 변화를 피할 수 있는가. 우리의 산업은 세계와 연결돼 성장했다. 그 연결에서 생기는 위험을 기술력 하나로 지울 수는 없다.

군사동맹의 종료가 곧바로 모든 무역과 금융의 단절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안보 협력이 약해지고 기술 이전이 까다로워지며 투자자들이 위험을 더 크게 평가하는 상황이 겹친다면, 기업과 가계가 감당할 비용은 커진다. 이는 조약에 자동으로 따라붙는 제재 목록이 아니라, 정부가 대비해야 할 복합적인 위험이다.

자주국방과 복지의 청구서는 누가 받는가

자주국방을 말하려면 그 위험을 견딜 능력과 비용을 함께 내놓아야 한다. 정찰과 조기경보, 지휘통제, 미사일 방어, 전쟁이 길어질 때의 탄약과 군수지원까지 어떤 능력을 언제 확보할 것인가. 국방예산을 얼마나 더 투입하고, 그 재원은 어디에서 마련할 것인가. 빈칸을 남겨 둔 채 자주라는 두 글자만 크게 쓰는 것은 국방계획이 아니다.

경제자립과 복지국가의 꿈도 마찬가지다. 수출과 투자가 흔들리고 안보 부담까지 커질 경우에도 약속한 복지를 유지할 재원이 있는가. 기업이 벌어들이는 소득과 시민이 내는 세금의 기반을 약하게 만들면서 지출 약속만 늘린다면, 그 계산서는 결국 다음 세대에게 넘어간다.

실용외교라면 국민 앞에 계산서를 내놓으라

이재명 정부의 실용외교도 이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중국과 무엇을 주고받았는지, 미국과의 협력에서 어떤 성과를 얻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 기업과 시민이 떠안은 비용은 얼마인지 드러나야 한다. 양쪽 정상과 사진을 찍었다는 것으로 국익을 입증할 수는 없다. 기술과 시장에 대한 접근, 안보의 신뢰, 국민의 소득으로 결과를 보여 줘야 한다.

미국에도 한국의 이익을 분명하게 요구해야 한다. 부당한 통상 요구에는 근거를 갖춰 맞서고, 우리 기업에 불리한 제도는 고치도록 협상해야 한다. 그러려면 함께 지킬 약속과 끝까지 요구할 이익이 선명해야 한다. 오랜 동맹의 신뢰까지 흔들어 놓고도 협상력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무책임하다.

필리핀에서는 중국에 다가가도 해양의 압박이 사라지지 않았다. 터키에서는 동맹국 지위가 첨단무기 사업의 참여를 보장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세계적인 산업 경쟁력도 잘못된 정책의 장기적 후과를 막지 못했다. 세 나라의 역사는 서로 다르지만, 축적한 국력과 과거의 성공이 다음 선택의 실패까지 막아 주지는 않는다는 경고는 같다.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선택을 하겠다면 먼저 국민 앞에 그 대체 수단과 비용을 내놓으라. 연합방위의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 기업의 기술·시장 접근이 좁아질 때 어떤 대책을 쓸지, 늘어날 부담을 누구의 세금으로 감당할지 설명하라. 국민은 정부의 구호가 아니라 그 계산과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통고문 한 장으로 종료 절차를 시작할 수 있는 조약 위에, 우리는 수십 년의 안보와 번영을 쌓았다. 그 세월이 앞으로의 신뢰까지 저절로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동맹을 잃고도 지금의 일자리와 재산, 복지를 지킬 수 있다는 정치라면, 그 자신감부터 증명하라. 국민의 삶을 담보로 시험할 권한을 준 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