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한민국 97세대 탐구

197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 대학에 들어간 세대. 운동권과 비운동권으로 갈라졌던 이들은 어떻게 2000년대 광장에서 비슷한 정치적 정서를 공유하게 되었을까. 한총련 활동가였던 필자가 자신의 세대를 내부에서 복기한다.

나는 2003년 한총련 중앙위원이었다. 이른바 NL 계열 학생운동에 몸담았다. 동시에 나는 197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 대학에 들어간 세대의 한 사람이다. 이 글에서는 이들을 ‘97세대’라고 부르려 한다. 90년대 학번, 70년대생이라는 뜻이다.

97세대는 하나의 집단이 아니다. 학생운동을 이끈 사람도 있었고, 운동권을 노골적으로 싫어한 학생도 훨씬 많았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도, 보수정당을 지지한 사람도 있었다. 그 차이를 지운 채 한 세대를 한 줄로 세우면 현실을 놓치게 된다.

그럼에도 설명해야 할 장면이 있다. 대학 시절 물과 기름처럼 보였던 운동권 출신과 비운동권 다수가 2000년대 이후 여러 광장에서 비슷한 노래와 상징, 분노와 애도의 언어를 공유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의 정치적 정서 안에서 만나게 되었을까.

이 글은 97세대 전체를 심판하려는 글이 아니다. 내가 속했던 운동과 내가 살아온 세대의 감정 구조를 내부에서 복기해보려는 시도다.

민주화 뒤에 대학에 들어간 운동권

97세대는 권위주의 정권의 폭력을 직접 경험한 1980년대 학번과는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청소년기를 보냈고, 경제성장과 대중소비문화의 확대를 경험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단순한 인기 가수의 출현이 아니었다. 청소년이 문화의 주변 소비자가 아니라 거대한 팬덤의 주체로 등장한 사건이었다. 뒤이어 H.O.T.와 S.E.S. 같은 1세대 아이돌이 강력한 팬덤 문화를 만들었다. 97세대는 조직이 아니라 취향으로 모이고, 같은 노래와 상징을 공유하며 집단적 열광을 경험한 첫 세대에 가까웠다.

대학의 풍경은 달랐다. 학생운동에 대한 일반 학생들의 반감은 커지고 있었지만 운동조직은 여전히 강했다. 전대협을 계승한 한총련은 전국 단위 조직과 출범식, 총학생회와 동아리, 농촌활동과 각종 교육을 통해 상당한 동원력을 유지했다.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가 사복경찰의 집단 구타로 숨진 뒤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박승희·김영균·천세용을 비롯한 학생과 노동자들의 분신이 잇따랐고, 5월 25일에는 김귀정이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숨졌다. 국가폭력에 대한 분노는 컸다. 동시에 거듭되는 죽음과 과격한 충돌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우려와 피로도 커졌다.

그 시기를 통과한 1990년대 초반 학번은 이후 한총련의 조직문화를 떠받쳤다. 운동의 언어는 더 단단해졌고, 조직은 구성원에게 더 강한 헌신을 요구했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로 PD 계열이 큰 충격을 받은 것과 달리, 북한을 사상적 준거로 삼던 NL 계열은 비교적 오래 조직적 우위를 유지했다.

내가 경험한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수사 현장은 1980년대의 고문 수사와는 달랐다. 나와 선후배들은 경찰과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내가 겪은 조사에서 고문이나 가혹행위는 없었다. 이것은 나의 경험이지 당시 모든 수사기관에서 인권침해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나는 한 가지 역설을 보았다. 눈앞의 폭력은 줄었는데 운동의 언어는 더 과격해졌다. 독재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독재 타도의 구호를 더 쉽게 외쳤다. 현실의 적이 멀어질수록 상상 속의 적은 더 거대해졌다.

1996년 연세대 사태는 그 간극을 드러냈다. 한총련 주도의 통일대축전을 둘러싸고 학생과 경찰이 격렬하게 충돌했고 5천 명이 넘는 학생이 연행됐다. 이듬해 제5기 한총련 출범식장 주변에서는 민간인 이석 씨가 학생들에게 구타당해 숨졌다.

국가폭력에 맞선다는 운동이 한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선한 목적은 폭력의 면허가 될 수 없었다. 한총련의 도덕적 권위는 급격히 무너졌다.

  • 선한 목적은
  • 폭력의 면허가 될 수 없었다.

출범식의 불꽃과 촛불광장

전대협과 한총련 출범식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그 압도적인 집단 경험을 기억한다. 거대한 깃발과 민중가요, 수만 개의 라이터 불꽃, 일제히 움직이는 군중은 참가자에게 강한 소속감과 도취감을 주었다.

옆 사람이 다치거나 누군가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는 순간, 집회의 주장과 사실관계를 차분히 따지는 일은 뒤로 밀리기 쉽다. 개인의 판단은 거대한 군중의 감정 속으로 들어간다. 광장의 열기는 용기를 주지만, 의심할 자유를 빼앗기도 한다.

나는 2000년대 촛불광장에서 이 문화의 흔적을 보았다. 노래와 공연, 상징물을 통해 낯선 사람들이 빠르게 하나의 감정 공동체가 되는 방식은 학생운동의 대규모 집회와 닮아 있었다.

그렇다고 촛불광장을 전대협과 한총련의 복사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2002년 두 여중생 사망 사건을 계기로 확산한 촛불집회는 인터넷 게시판의 제안과 온라인 정보 확산, 시민단체의 조직, 개인과 가족 단위의 자발적 참여가 함께 만든 새로운 집회 형식이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 2016~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도 의제와 참가자, 조직 방식이 서로 달랐다.

연속성과 단절이 함께 있었다. 전통적인 운동조직은 무대와 행진, 구호와 질서 유지에 익숙했다. 인터넷과 대중문화에 익숙한 시민은 집회를 문화행사처럼 바꿨다. 운동권의 조직 경험과 비운동권 시민의 자발성이 광장에서 결합했다.

어느 한 조직이 촛불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 어느 한 진영이 광장을 소유할 수도 없다.

운동권을 싫어했던 사람들도 왜 광장으로 갔나

1990년대 대학에서 운동권을 싫어했던 사람들에게도 광장은 점차 낯선 공간이 아니게 됐다.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은 대규모 군중 속에서 노래하고 상징을 공유하는 경험을 일상 가까이 가져왔다. 같은 해 여중생 사망 사건 촛불집회는 애도와 분노를 결합했다. 2004년과 2008년의 집회는 인터넷으로 정보를 나누고 거리에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일을 하나의 세대 경험으로 만들었다.

운동권 출신과 비운동권 시민은 같은 조직에 속하지 않고도 비슷한 감정의 문법을 익혔다. 불의한 권력에 맞선다는 서사, 희생자에 대한 애도, 광장에 모인 숫자가 주는 도덕적 확신이다.

광장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공간이다. 시민은 선거와 선거 사이에도 권력을 비판하고 의견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2016~2017년 촛불집회가 헌법 절차 안에서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으로 이어진 사실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러나 광장에 사람이 많이 모였다는 사실이 그곳에서 유통되는 모든 정보의 진실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2008년 촛불집회에서는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을 둘러싸고 과장되거나 부정확한 정보가 빠르게 번졌다. 반대로 정부는 시민의 불안을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하지 못했다. 불신과 과장이 서로를 키웠다.

광장은 민주주의를 움직였다. 동시에 감정이 검증을 앞설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 광장은 민주주의를 움직였다.
  • 동시에 감정이 검증을 앞설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노무현의 죽음과 정서적 공동체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97세대에 또 하나의 강렬한 집단 기억을 남겼다. 죽음을 함께 애도하는 경험은 정치적 차이를 잠시 지우고 사람들을 하나의 정서 안에 묶었다. 그 기억은 이후 정치적 사건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하나로 이후의 정당 통합이나 세대 투표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2011년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가 만든 새진보통합연대의 합당으로 출범했다. 서로 다른 이념과 조직이 선거제도와 정치적 이해, 진보정치 재편 논의 속에서 결합한 결과였다. 노무현의 죽음은 그 시대의 정서적 배경 가운데 하나일 수 있지만 직접 원인으로 볼 근거는 부족하다.

2022년 대선 출구조사에서 당시 40대는 이재명 후보에게 높은 지지를 보였다. 그러나 이 결과를 근거로 97세대 전체가 하나의 이념에 포획됐다고 말하는 것도 지나치다. 세대의 투표에는 성장기의 정치 경험만이 아니라 직업과 자산, 주거와 자녀교육, 지역과 성별, 당시 정권에 대한 평가가 함께 작용한다.

세대론은 설명의 출발점이지 판결문이 아니다.

기억은 근거가 될 수 있지만 면허가 될 수는 없다

97세대는 민주화 이후의 자유를 누렸고, 대중문화의 폭발과 인터넷의 등장을 경험했으며, 여러 차례의 광장에서 집단적 힘을 확인했다. 동시에 운동의 선한 목적이 조직의 오류를 가려준 순간과 애도와 분노가 사실 확인을 앞선 순간도 함께 겪었다.

내가 돌아보려는 것은 어느 정당을 지지했느냐가 아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을 무엇으로 검증해왔느냐는 것이다.

주변의 박수와 광장의 규모, 같은 세대의 공감이 판단의 근거를 대신하지는 않았는가. 반대편의 과장은 쉽게 찾아내면서 내 편의 과장에는 관대하지 않았는가.

정치세력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지지층의 감정을 이용한다. 단편적인 사실을 골라내고, 피해와 희생의 서사를 붙이고, 상대를 악으로 단순화한다. 시민이 이 구조를 벗어나는 길은 다른 진영의 구호로 갈아타는 것이 아니다. 출처를 확인하고, 반론을 읽고, 예측이 틀렸을 때 자신의 판단을 고치는 것이다.

광장은 시민의 것이어야 한다. 어느 세대와 조직도 광장을 소유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많이 모이는 능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흩어진 뒤에도 사실을 확인하고 권력을 감시하며 자신의 오류를 고칠 수 있어야 한다.

97세대가 회복해야 할 것은 젊은 시절의 열정이 아니다. 그 열정을 스스로 의심하고 검증할 수 있는 시민의 힘이다.

  • 회복해야 할 것은 젊은 시절의 열정이 아니다.
  • 그 열정을 스스로 의심하고 검증할 수 있는 시민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