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업을 ‘적’으로 보는 심판, 그 경기가 공정하겠나
기업을 적으로 보는 사람이 시장의 심판일 수 있는가. 기업의 성공은 규제의 공으로 돌리고, 효과가 부족하면 더 강한 규제를 요구하는 인식에 씨앗은 반대한다. 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권력에도 입증과 책임이 있다.
심판이 한쪽 편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진행한다면 누가 그 판정을 믿겠나. 한쪽 선수는 보호할 대상으로, 다른 쪽 선수는 몰아낼 적으로 본다면 경기는 시작부터 기울어진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정부가 시장의 심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10월 12일 국정감사에서는 재벌과 대기업집단의 세습경제를 착취적 대한민국을 만드는 적으로 지목했던 생각을 지금도 유지한다고 밝혔다. 표현이 과도했다는 설명은 붙였지만, 판단은 거두지 않았다.[1]
기업의 지배구조를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기업을 조사하고 제재하는 사람이 그 대상을 적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기업의 어떤 행동이 잘못됐는지 살피기도 전에, 그 기업이 속한 집단부터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업이 이런 심판 앞에서 마음 놓고 투자하고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수 있겠나. 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한지, 위원장의 생각에도 맞춰야 하는지 걱정하게 된다. 이 불신을 기업의 피해의식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성공은 규제 덕분, 효과가 없으면 규제 강화인가
그의 과거 발언을 보면 우려는 더 커진다. 지난해 11월 그는 대기업집단 규제가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지적에 규제를 줄이기보다 실효성을 더 강화하는 쪽으로 답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지금의 규제 속에서 성장했다는 사실도 규제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제시했다. 강화된 제도 안에서 살아남을 혁신기업을 가려낸다는 취지의 설명도 했다. [2]
규제가 있는데도 성공한 것과 규제 덕분에 성공한 것은 다르다. 짐을 지고 달린 선수가 좋은 기록을 냈다고 해서, 그 짐이 기록을 만들어줬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업의 성공 뒤에는 연구자의 밤샘, 노동자의 숙련, 경영자의 판단, 실패를 감수한 투자가 있다. 규제기관이 그 성공까지 자기 규제의 성과로 가져가는 것은 오만하다. 규제 때문에 늦어진 투자와 포기한 사업은 어디에 계산돼 있나.
잘되면 규제가 옳았기 때문이고, 효과가 없으면 규제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논리에서는 규제가 끝없이 늘어날 수 있다. 무엇이 잘못 설계됐는지, 무엇을 줄일지 돌아볼 자리가 사라진다. 기업은 언제나 더 감시받을 대상이 되고, 규제기관은 언제나 더 큰 권한을 가질 이유를 얻는다.
작은 기업에도 필요한 것은 성장할 자유다
씨앗은 이런 사고방식에 반대한다. 기업의 자유가 출발점이다. 그 자유를 제한하려는 정부에 제한의 이유와 효과를 설명할 책임이 있다. 공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규제가 저절로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규제의 비용은 서류 한 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보고서를 쓰느라 사람을 쓰고, 법률 검토에 돈을 쓰고, 조사에 대응하느라 시간을 쓴다. 그 부담은 결국 투자와 채용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정부가 얻는 통제력의 반대편에는 기업과 시민이 치르는 비용이 있다.
작은 기업을 위한다는 말도 이 비용을 없애주지 않는다. 대기업을 더 누르면 작은 기업이 더 잘된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경쟁하기도 하지만 함께 제품을 만들고, 함께 수출하고, 서로의 거래처가 되기도 한다. 큰 기업의 투자가 줄면 작은 기업의 주문도 줄어들 수 있다.
작은 기업에 필요한 것은 작은 상태로 보호받는 자리만이 아니다. 더 커질 기회다. 새 사업을 시작하고, 고객을 늘리고, 큰 기업과 경쟁할 자유다. 이미 큰 기업을 제약하는 것으로 작은 기업의 미래를 대신할 수는 없다.
심판이 혁신기업을 고르는가
국가가 자기 제도 안에서 살아남을 혁신기업을 가려내겠다는 생각도 위험하다. 고객에게 좋은 제품을 내놓는 능력보다 규제당국의 요구에 적응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면, 기업은 기술보다 정부의 눈치를 먼저 살피게 된다.
심판은 경기 규칙을 적용하는 자리다. 자신이 원하는 선수만 살아남는 경기를 설계하는 자리가 아니다.
기업의 이익은 시민의 손실과 같지 않다
기업의 큰 이익도 그 자체로 착취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기술을 개발해 세계의 고객에게 제품을 팔고 얻은 이익을 국민에게서 빼앗은 돈처럼 볼 수는 없다. 기업은 없던 제품을 만들고, 생산성을 높이고, 새로운 시장을 열면서 부를 만들어낸다. 누군가 잘살게 됐다는 사실이 곧 다른 누군가를 가난하게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위법행위에는 구체적인 증거와 책임이 있다. 기업이 크다는 사실, 가족이 지분을 물려받았다는 사실, 많은 이익을 냈다는 사실은 그 증거를 대신하지 못한다. 재벌이라는 말 하나로 기업의 성과와 활동을 의심하는 것은 공정한 판단과 거리가 멀다.
씨앗이 지키려는 기업의 자유에는 시민의 삶이 연결돼 있다.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 납품하는 협력업체, 주식을 가진 시민, 제품을 고르는 소비자가 그 안에 있다. 기업을 적대하는 규제의 부담이 총수 한 사람에게만 돌아간다는 생각은 현실을 지워버린다.
공정이라는 이름의 권력도 감시 대상이다
주 위원장의 문제는 말이 거칠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업의 성공을 규제의 공으로 돌리고, 규제의 부족한 성과를 강화의 이유로 삼으며, 정부가 혁신기업을 가려내겠다는 인식이다. 이런 인식을 가진 사람이 강한 조사·제재 권한까지 쥐고 있다면 기업의 자유가 충분히 존중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 어렵다.
반기업적이지 않다는 말은 이 불신에 대한 답이 되지 않는다. 기업의 정당한 이익을 인정하는지, 규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줄일 수 있는지, 자신의 생각과 다른 기업의 판단도 존중하는지가 답이다.
공정은 심판의 권한을 늘리는 구호가 아니다. 어느 편도 심판의 눈치를 보느라 자기 실력을 펼칠 기회를 잃지 않는 경기다.
기업을 적으로 보는 심판에게 기업의 자유를 안심하고 맡길 수는 없다. 지금 시민이 경계할 것은 큰 기업의 힘만이 아니다.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그 기업의 자유를 좌우하는 권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