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소리

칼럼

영화적 상상력은 역사 왜곡의 면죄부인가

일본은 소설과 드라마로 료마를 거듭 살려냈다. 우리는 영화로 산업화를 이끈 박정희를 두 번 죽일 것인가. 공과 과는 사실로 평가해야 한다. 확인된 잘못을 비판하는 것과 입증되지 않은 살인의 배후라는 의심을 씌우는 것은 다르다.

일본은 사카모토 료마를 소설과 드라마로 거듭 살려냈다. 실존 인물의 행적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근대화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박정희를 아내의 죽음을 기획한 사람으로 의심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영화적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박정희는 이미 암살로 생을 마쳤다. 그에게 입증되지 않은 살인의 배후라는 의심까지 씌워 역사 속 공로를 묻어버린다면, 우리는 그를 두 번 죽이는 셈이다.

잘못을 따지는 것과 상상으로 죄를 만드는 것은 다르다. 이 차이를 지키지 못하면 역사 비판은 역사적 인물의 명예를 파괴하는 정치가 된다.

일본은 료마를 어떻게 영웅으로 만들었나

사카모토 료마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다. 막부 말기에 활동하며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을 중개했고, 메이지유신을 앞둔 1867년 암살됐다. 일본의 변화에 실제로 기여한 인물이다.[1](https://www.ndl.go.jp/portrait/e/datas/89)

그러나 실존한 료마와 오늘날 대중이 기억하는 료마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와 NHK 드라마가 있다. 기록 속 인물에 매력적인 성격과 극적인 서사가 더해지면서, 료마는 시대를 앞서 보고 일본의 미래를 열어낸 영웅으로 기억됐다.

김욱의 연구는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시바는 사료와 설화, 연구 성과에 상상력을 더하면서도 자신이 창작한 인물과 역사 속 인물을 구분하려 했다. 반면 NHK의 〈료마전〉은 소설의 인물상을 상당 부분 이어받아 강화했고, 결점까지 보완한 지도자로 그려냈다. 소설이 만든 이미지가 드라마를 거쳐 실제 인물에 대한 인식으로 굳어진 것이다.[2](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37112)

소설이 역사를 대신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일본의 영웅 만들기 역시 사실과 창작을 구분해 검증해야 한다. 다만 이 사례는 분명한 사실을 보여준다. 문화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고, 그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까지 바꿀 수 있다.

그 힘은 영웅을 만드는 데만 쓰이지 않는다. 같은 힘으로 영웅을 지우고 악인을 만들 수도 있다.

공과 과가 있는 사람에게, 없던 죄까지 만들 것인가

박정희에게는 공과 과가 있다. 권위주의 통치와 정치적 탄압은 비판받아야 한다. 산업화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자유를 억압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책임을 묻는 일이 산업화를 이끈 역할까지 지우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한국의 산업화는 대통령 한 사람이 만든 기적이 아니었다. 국민이 땀 흘려 일했고, 기업이 위험을 감수하며 도전했다. 기술자와 노동자, 해외에서 일한 사람들, 자녀의 교육을 위해 희생한 부모들의 삶이 쌓였다. 그 과정에서 국가의 산업화 전략과 이를 추진한 지도자의 역할도 함께 평가해야 한다.

국민의 노력을 인정한다고 지도자의 공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도자의 역할을 인정한다고 국민의 희생이 그 사람의 소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의 성취는 이들이 함께 만든 역사다.

박정희를 비판하려면 실제로 한 일을 비판하면 된다. 확인된 잘못만으로도 충분히 따질 수 있다. 거기에 아내를 죽인 사람이라는 의심까지 보태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공로가 있다는 이유로 잘못을 덮을 수 없듯, 싫어한다는 이유로 없던 죄를 만들 수도 없다.

의문이 있다는 것과 배후가 입증됐다는 것은 다르다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란에서 제작진은 특정 인물을 사건의 배후로 규정하지 않았고, 영화 속 가설을 역사적 사실로 제시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설명은 그대로 전해야 한다.[3](https://www.koreaejournal.com/news/471048)

그러나 제작진의 설명만으로 작품이 관객에게 남기는 역사적 인상까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인물과 사건을 가져온 영화라면, 어떤 장면이 기록에 근거하고 어떤 연결이 창작인지도 따져야 한다.

문화일보는 당시 기록을 대조하며 경호원들의 대응사격이 있었다는 점을 짚었다. 또한 정권이나 중앙정보부의 사건 기획설을 뒷받침할 근거는 공개된 한·미·일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고 보도했다.[4](https://v.daum.net/v/20260930115943505)

수사 기록에 의문이 있다면 검증하면 된다. 새로운 증거가 있다면 공개하면 된다. 그러나 설명되지 않은 대목이 있다는 사실이 곧 특정인의 범죄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의문과 의문 사이를 상상으로 연결한다고 증거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특히 아내의 죽음을 남편이 기획했다는 의심은 한 사람의 정책이나 통치방식에 대한 비판을 넘어선다. 그 사람의 인격과 생애 전체를 살인의 그림자 아래 놓는 주장이다. 그런 의심을 역사적 평가의 근거로 삼으려면 그 무게에 걸맞은 증거가 있어야 한다.

영화를 봤는데, 역사를 봤다고 기억한다

역사 영화의 영향은 상영관에서 끝나지 않는다. 관객에게는 허구라는 안내보다 배우의 얼굴과 결정적인 장면이 더 오래 남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창작이라는 조건은 흐려지고, 그 장면만 실제 있었던 일처럼 반복된다.

료마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도 이런 기억의 힘이다. 소설과 드라마가 만든 인물상이 실제 인물에 대한 인식으로 옮겨갈 수 있다면, 영화가 만든 범죄의 의심도 역사적 사실처럼 기억될 수 있다.

그래서 “영화일 뿐”이라는 말로 모든 책임을 벗을 수 없다. 실제 사건에서 신뢰를 빌려왔다면, 사실과 상상의 경계도 분명히 설명해야 한다. 창작의 자유에는 작품을 비판하고 근거를 묻는 시민의 자유도 함께 따라붙는다.

일본이 료마를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우리도 박정희를 흠 없는 인물로 꾸며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일본의 영웅 만들기에도 검증이 필요하다. 우리가 지켜야 할 기준은 더 간단하다. 실제 공로는 인정하고, 실제 잘못은 따지며, 입증되지 않은 범죄는 사실의 자리에 놓지 않는 것이다.

한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는 데 국민과 기업이 함께 만든 산업화의 성취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과거의 지도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딛고 선 역사까지 허물 이유도 없다.

일본은 소설로 근대화의 영웅을 다시 살려냈다. 우리는 영화로 근대화의 영웅을 두 번 죽일 것인가.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사실로 평가하면 된다.

영화적 상상력은 역사 왜곡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