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소리

칼럼

죽음으로 달려가는 세상, 어떻게 하나?

인천 구월동 흉기난동 사건이 남긴 질문. 위험 신호를 놓친 사회와 국가의 빈틈을 돌아보고, 죽음을 막는 것을 넘어 사람이 다시 살아갈 이유를 만드는 공동체를 생각한다.

10월 13일 오후, 인천 구월동의 대형 상업시설에서 평범한 점심시간이 무너졌다. 한 남성이 일면식도 없는 이용객들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시민 10명이 공격을 받았고 8명이 다쳤다. 그중 19세 여성은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다. 응급수술 뒤 심장박동은 돌아왔지만, 15일까지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1]

누군가에게 그곳은 밥 한 끼 먹는 자리였다. 누군가에게는 생계를 이어가는 일터였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범하게 지나던 공간이었다. 그 누구도 이런 공격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범행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 위험 신호가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피의자는 과거 살인미수 전력이 있어 전자발찌를 착용하고 있었다. 지난달에는 흉기 소지 혐의로 입건됐고, 사건 일주일 전 경찰 조사를 받았다. 범행 당일 오전에도 보호관찰관을 만났다.[2]

국가가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확인된 정보가 얼마나 위험한 신호였고 어떤 조치가 가능했는지는 엄밀히 따져볼 일이다. 그러나 그 사이 시민들이 무방비로 공격받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피의자는 병원 치료에 대한 불만과 경찰 수사에 대한 불만을 사회에 알리고 싶었고, 관심을 끌 사건을 만들려 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범행 동기의 전모는 수사를 통해 밝혀질 문제다.[1] 어떤 불만도 무고한 시민을 해칠 이유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현장에서는 시민들이 의자를 들어 공격을 막고 피의자를 제압했다.[3] 시민들이 서로를 지키기 위해 나서야 했던 그 순간, 위험을 사전에 발견하고 시민을 보호하도록 마련된 제도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었는가.

또 다른 곳에서는 사람이 홀로 절망의 시간을 버티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혼자 살던 사람이 숨진 지 한참 뒤에 발견되기도 한다. 타인을 공격하는 범죄와 자신의 생명을 잃는 비극을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사람의 위험과 고통을 얼마나 늦게 알아차리는지, 또 그 신호를 얼마나 쉽게 흘려보내는지는 함께 물을 수 있다.

흉기난동이 발생하면 경찰의 책임을 이야기한다. 자살 사건이 발생하면 우울증과 상담, 치료를 이야기한다. 고독사가 발생하면 1인 가구와 복지 사각지대를 이야기한다. 서로 다른 사건을 담당 기관의 업무로 나누고 나면, 한 인간의 삶과 관계가 무너져가는 과정은 자꾸 시야에서 사라진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전문가가 나오고 정부가 대책을 발표한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잊어버린다.

그러다 또 누군가 죽는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떠나보내고 있는가.

하루에 39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나라

2025년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1만 4,144명이다. 하루 평균 38.8명이다. 전년보다 감소했지만 여전히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 숫자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담하다.

매일 이 나라에서 약 39명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며 생을 마감한다는 뜻이다.

그들에게는 가족이 있었을 것이다. 친구와 동료가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얼마 전까지 함께 식사했고, 누군가는 며칠 전까지 같은 직장에서 일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2026년 국내에서 발표된 고립·은둔 청년 연구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청년 486명을 분석한 결과, 자살과 자해 생각에 깊이 관련된 것은 단순히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상태만이 아니었다. 정서적 고립과 과거의 부정적 경험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산다고 외롭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가족이 있다고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는가.

어쩌면 사람을 살리는 데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것인지 모른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절망

흉기난동과 자살은 분명히 다르다.

자살은 자신의 생명을 잃는 비극이고, 무차별 살인은 아무 잘못 없는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범죄다. 가해자의 불행이 살인의 책임을 덜어줄 수는 없다.

그런데 두 현상에서 발견되는 일부 심리적·사회적 위험 요인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사회에서 밀려났다는 감각, 반복된 실패와 좌절,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외로움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무능력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사람은 사회와 타인에게 책임을 돌린다.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극단적인 분노와 자신을 향한 절망이 때로는 같은 사람 안에 존재하기도 한다.

미국 비밀경호국의 대규모 폭력범죄 연구에서도 일부 가해자들은 범행 이전부터 대인관계 갈등과 개인적인 위기, 주변 사람들이 우려할 만한 행동을 보였다.

그렇다고 고립된 사람들이 폭력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대부분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채 자신의 고통을 견디며 살아간다.

우리의 관심은 고립된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데 있지 않다.

사람이 이토록 깊은 절망과 적개심에 빠질 때까지 우리 사회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가 하는 데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에게 이렇게 잔인해졌나

미국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2023년 《애틀랜틱》에 「미국은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졌는가」라는 글을 썼다.

그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왜 사람들은 이토록 슬퍼졌는가. 그리고 왜 서로에게 이렇게 잔인해졌는가.

그의 진단은 단순한 경제적 불평등이나 정신건강 문제를 넘어선다.

가족과 학교, 직장과 지역공동체가 사람들에게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길러주던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쟁하는 법은 배웠지만 실패한 사람을 대하는 법은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박수를 보내지만 실패한 사람에게는 냉정하다. 능력 있는 사람은 존중하지만 무능해 보이는 사람은 쉽게 무시한다.

심지어 타인의 실패가 조롱거리가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누군가의 불행에 악성 댓글이 달린다. 직장에서는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짐이 되고,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한다.

우리는 스스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능력에 따른 경쟁이 인간의 존엄까지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면, 그 사회에서 실패한 사람은 어디에 설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는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실패했다가 다시 일어선 사람의 이야기는 얼마나 남아 있는가.

사람을 살리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중앙일보가 보도한 한 자살 사별자의 회복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동생을 잃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던 한 청년에게 친구가 말했다.

"김밥 한 줄이라도 같이 먹자."

그 짧은 말이 그를 사람들 곁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후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며 다시 삶의 활력을 찾았다고 한다.

거창한 지원도, 복잡한 정책도 아니었다.

누군가 함께 밥을 먹자고 손을 내밀었다.

이것이 모든 절망을 해결하는 방법일 수는 없다. 깊은 우울이나 자살위험에는 전문적인 치료와 지속적인 지원도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자주 사람의 마음을 제도와 전문가에게만 맡기려 한다.

외로움은 상담실에서만 해결되지 않는다. 무력감은 지원금을 받았다고 곧바로 사라지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불신도 몇 차례의 교육으로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실패하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믿음이다.

그런 믿음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 관계를 너무 쉽게 잃어버리고 있다.

일본은 '죽지 않게 하는 정책'에서 '살아가게 하는 정책'으로 눈을 돌렸다

일본의 자살예방 정책에는 우리 사회가 주목할 만한 철학이 있다.

일본은 자살을 개인의 의지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경제적 어려움, 실직, 질병, 가족관계와 고립 등 복합적인 문제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자살대책기본법에 '살아가는 것에 대한 포괄적 지원'이라는 원칙을 명시했다.

단지 자살할 위험이 있는 사람을 상담하고 치료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무너진 사람이 다시 생활을 꾸릴 수 있도록 돕고, 고립된 사람이 사회와 연결되도록 하며, 직장과 학교와 지역사회가 함께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방향이다.

영국도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사회적 처방'이라는 제도를 운영한다.

의료기관에서 외로움과 고립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약이나 상담만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모임과 활동, 복지서비스, 주거·채무 상담 등을 연결해주는 방식이다.

물론 이런 제도의 효과는 지속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접근의 차이다.

사람의 고통을 단지 질병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그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 전체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다.

우리도 이 방향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죽음이 발생한 다음에야 움직이는 국가

우리나라에도 자살예방센터가 있고 정신건강복지센터가 있다. 고립·은둔 청년을 위한 사업도 생겼다. 지역마다 수많은 복지사업이 운영된다.

그런데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그 지원이 닿고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2026년 9월 감사원이 공개한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응급실을 방문한 자살시도자 가운데 81.4%의 정보가 자살예방센터에 전달되지 않았다.

위험에 처한 사람이 이미 응급실까지 왔는데도 지역사회의 지속적인 지원체계와 연결되지 못한 경우가 그렇게 많았다는 뜻이다.

한쪽에서는 자살예방 예산을 쓰고, 다른 쪽에서는 실제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이 관리망 밖으로 빠져나간다.

문제는 단순히 예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와 실제 위험에 처한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데 있다.

흉기난동 사건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남는다.

구체적인 위협이 신고됐는가. 주변에서 위험한 행동을 알고 있었는가. 경찰과 의료기관, 지역사회가 개입할 기회가 있었는가.

미국의 폭력예방 연구는 이 같은 위험 신호를 여러 기관이 함께 평가하고 대응하는 체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살 예방과 폭력범죄 예방은 서로 다른 전문적 대응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위기로 치닫는 과정에서 기관들이 서로 단절돼 있다면 놓치는 신호가 생길 수 있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것은 사건이 발생한 뒤의 수습만이 아니다.

사람이 위기에 빠졌을 때 실제로 작동하는 안전망을 갖추는 일이다.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는 흔히 사회문제가 심각해지면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예산을 늘리는 데서 해결책을 찾는다.

그러나 행정조직이 늘어난다고 이웃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위험군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위험에서 벗어난 사람이 다시 돌아갈 사회가 없다면 문제는 반복될 수 있다.

실직한 사람이 다시 일할 기회를 얻고,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학교를 떠난 청소년이 배움과 관계를 회복하고, 고립된 청년이 자신을 환영하는 공동체를 만나는 일.

이것이 단순한 복지 확대와 다른 지점이다.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남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지역사회에는 이미 학교와 도서관, 복지관과 체육시설, 종교기관과 시민단체, 수많은 자원봉사 조직이 존재한다.

이들이 단순히 행사를 열고 참여 인원을 채우는 곳을 넘어, 고립된 사람을 찾아내고 관계를 이어주는 공간이 된다면 어떨까.

행정기관도 지원 대상을 분류하고 예산을 집행하는 기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실제 지역의 일자리와 사람, 공동체에 연결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시민들도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혼자 지내는 이웃의 안부를 묻고, 실패한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부터 부담을 느끼게 만드는 사회가 아니라, 도움을 청해도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

바로 그런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 있는가

우리는 그동안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쉼 없이 달려왔다.

국가의 경제 규모가 커졌고, 도시에는 높은 건물이 들어섰으며, 세계가 놀라는 기술과 산업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 성장의 뒤편에서 사람은 얼마나 행복해졌는가.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신뢰하게 되었는가.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는 사회가 되었는가.

죽음의 문턱에 선 사람에게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이유를 만들어주는 사회인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기 어렵다.

흉기난동으로 무고한 시민이 희생되는 일도, 누군가 홀로 절망 끝에 생을 마감하는 일도 더 이상 사건이 발생한 뒤에만 관심을 갖는 방식으로는 충분히 대응할 수 없다.

범죄는 단호히 막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자살위험에는 전문적인 치료와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그보다 넓은 자리에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사회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단지 생명을 구하는 기술이 아니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며, 실패한 사람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공동체의 힘이다.

죽음을 줄이는 데만 몰두하는 사회와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주는 사회는 같지 않다.

우리는 지금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가.

죽음으로 달려가는 세상. 그 방향을 바꾸는 출발점은, 결국 사람에게 다시 관심을 갖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