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감시
시민을 가르치겠다는 국가
씨앗의 소리는 정부가 시민참여와 시민사회를 하나의 행정체계로 묶는 법안의 조직구조에 반대한다. 시민사회가 독립적으로 말하는 소통구조를 제안하며, 그 안에 민주시민교육을 결합하는 데도 반대한다.
시민참여기본법의 정부 주도 구조와 민주시민교육에 반대한다
시민참여기본법안은 시민의 참여를 넓히겠다며 시민정책참여, 숙의·공론화, 민주시민교육, 시민사회 활성화를 하나의 체계로 묶었다. 이 정책들을 다룰 국가시민참여위원회는 행정안전부 장관 소속으로 두도록 했다.
정부가 시민참여의 계획을 세우고, 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의 참여체계와 시민사회 지원을 연결한다. 그 안에서 시민에게 필요한 교육까지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이해식 의원 등이 2025년 12월 31일 발의한 이 법안은 현재 국회 심사 단계에 있다. 법안에는 시민의 자율적 활동과 교육받을 권리도 담겨 있다. 그러나 시민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선언과 시민사회가 실제로 국가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인지는 별개다.[1][2]
**씨앗의 소리는 시민참여기본법안의 정부 주도 조직구조에 반대한다. 시민사회의 자유로운 의견을 듣는 소통구조가 필요하며, 그 구조에 민주시민교육을 결합하는 것에도 반대한다.**
시민이 정부를 찾아가 정해진 절차 안에서 의견을 내는 것만으로 시민참여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시민사회가 정부의 밖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고, 정부가 듣기 싫어하는 말도 전달하며, 필요할 때는 정부와 대립할 수 있어야 한다.
시민사회는 정부의 사업이 아니다
시민사회에는 환경단체도 있고 경제단체도 있다.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단체와 기업의 자유를 지키려는 단체가 있으며, 세금 부담을 줄이자는 시민과 복지를 확대하자는 시민이 함께 존재한다.
지역의 작은 모임도 시민사회이고, 어떤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자신의 생활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시민도 시민사회의 일부다.
이처럼 시민사회는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가 부딪히며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정부가 하나의 창구를 만들고 몇몇 단체를 참여시키는 것으로 그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
그런데 시민참여기본법안은 시민참여와 시민사회 활성화를 정부의 종합계획과 연도별 시행계획 안에 놓는다. 행정안전부 장관 소속 위원회가 그 체계의 중심이 된다. 법안은 위원회의 독립적인 업무 수행도 규정하지만, 위원장의 임명과 위원의 위촉에는 정부가 관여한다.[1][2]
시민사회를 정부가 정한 계획과 조직 속에서 다루기 시작하면 행정의 편의가 시민의 자율성보다 앞설 수 있다. 어떤 의제를 다룰지, 어느 단체의 의견을 들을지, 어떤 사업에 예산을 배정할지를 정부의 체계가 좌우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정부가 시민사회를 지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원한다는 이유로 시민사회 전체를 하나의 정책 대상으로 묶어서는 안 된다.
**시민사회는 정부가 육성하고 관리하는 산하기관이 아니다. 정부를 감시하고 정부와 다른 길을 제안하는 독립된 공간이다.**
정부위원회 하나 더 만든다고 시민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정부에는 이미 수많은 위원회가 있다. 전문가와 민간위원이 참여하지만, 의제는 행정부가 정하고 회의자료는 담당 부처가 준비하며, 위원들은 정해진 시간 안에 의견을 낸다.
이런 구조의 위원회가 행정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자율적인 목소리를 정부에 전달할 통로까지 같은 방식으로 만들 수는 없다.
시민사회가 정부의 정책에 의견을 보태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가 잘못된 의제를 설정했다면 그 의제 자체를 바꾸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이 시민의 자유를 침해한다면 사업을 중단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위원을 선정하고, 회의 의제를 정하고, 예산과 사무를 관리하는 구조에서 그런 목소리가 얼마나 자유롭게 전달될 수 있을까. 민간위원의 숫자를 늘리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어떤 시민단체가 위원회에 참여하느냐도 중요하다. 오랫동안 정부와 협력해 온 단체가 있다고 해서 그 단체가 시민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전국의 작은 단체와 지역 주민, 특정한 조직에 속하지 않은 시민의 의견까지 몇몇 인사에게 위임된 것도 아니다.
정부가 소통할 상대를 정하고, 그 상대가 다시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구조가 된다면 시민의 목소리는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좁아질 수 있다.
시민사회의 소통구조는 기존 위원회와 달라야 한다
시민사회와 정부 사이에 대화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시민의 경험이 정책에 반영되지 않으면 정부는 현실을 놓치기 쉽고, 사회의 갈등도 깊어진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행정부 안에 시민사회를 위한 위원회 하나를 더 만드는 일이 아니다. **시민사회가 정부로부터 독립된 자리에서 의제를 만들고, 그 의견을 정부에 전달하며, 정부의 답변과 이행까지 확인할 수 있는 소통구조**다.
그 구조에서는 먼저 시민사회가 누구와 무엇을 논의할지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먼저 안건을 만든 뒤 시민에게 찬반을 묻는 방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시민이 정부의 계획에 없는 문제를 제기하고, 기존 정책의 중단이나 변경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참여 주체도 고정된 몇몇 단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역과 분야, 규모와 관점이 다른 단체들이 참여할 길을 열어야 한다. 단체에 속하지 않은 시민의 의견을 듣는 통로도 필요하다. 어느 조직도 시민사회 전체를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시민사회의 제안에 답하는 절차도 있어야 한다. 제안을 받았다면 검토 결과와 수용·불수용 이유를 공개하고, 받아들인 사항은 실제로 이행했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을 자유도 보장돼야 한다.
소통기구의 운영비에 공적 재원이 쓰일 수는 있다. 하지만 예산을 지원하는 행정부가 참여자와 의제, 발언의 내용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 참여자 선정과 예산 사용, 회의 결과는 공개하고 시민사회 내부의 대표성과 책임성도 함께 검증받아야 한다.
시민사회가 정부의 관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 시민단체가 아무에게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시민사회의 권력 역시 시민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
그 안에 왜 민주시민교육을 넣는가
정부 주도의 시민참여체계 안에 민주시민교육까지 넣는다면 우려는 더 커진다.
시민사회와 정부가 소통하는 통로는 서로 다른 의견을 전달하고 정책을 검증하는 자리다. 그런데 그 안에 정부가 시민의 역량을 기르겠다는 교육 기능을 함께 두면, 시민이 정부에 무엇을 말할 것인가의 문제와 정부가 시민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가 한 체계에서 다뤄진다.
앞서 씨앗의 소리는 시민언어 [「시민이면 충분하다 — 왜 굳이 시민 앞에 ‘민주’를 붙이는가」](/seed-language/citizenship-beyond-democratic-label-2026/)에서 물었다. 시민을 국가가 교육해야 할 대상으로 볼 것인가, 스스로 판단하고 성장하는 주체로 인정할 것인가.
이 질문은 시민참여기본법안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누가 민주시민의 기준을 정하는가. 누가 교육 내용을 만들고 강사를 선정하는가. 그 교육에서 정부와 시민단체의 견해에 반대하는 시민은 어떤 자리에 놓이는가.**
법안이 모든 시민에게 교육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시민교육을 하는 모든 사람이 특정한 정치적 주장을 주입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러나 교육과 참여, 시민사회 지원이 하나의 정부 정책체계에 묶일 때 교육의 내용과 예산이 어떤 방향으로 정해질지는 시민의 자유와 직결된다.
민주시민교육을 지지하는 쪽은 시민이 민주주의의 제도와 권리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과 토론할 기회를 넓히려 한다고 말한다. 시민이 배우고 토론할 기회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 필요가 정부 주도의 시민참여체계 안에 민주시민교육을 넣어야 한다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누가 바람직한 시민을 정하는가
복지 확대를 지지하는 시민과 세금 인하를 요구하는 시민 가운데 누가 더 민주시민인가.
정부가 추진하는 공론장에 참석하는 시민과 그 공론장의 의제 설정이 잘못됐다며 참여를 거부하는 시민 가운데 누가 더 책임 있는 시민인가.
원자력발전을 지지하는 시민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주장하는 시민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성숙한 시민인가.
이 질문에 국가가 교육을 통해 답을 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시민은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살아간다. 민주주의는 그 차이를 없애는 제도가 아니라 서로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면서 차이를 드러내고 경쟁하는 질서다.
헌법과 법률, 국가의 제도를 가르치는 일과 논쟁 중인 정책에 특정한 결론을 제시하는 일은 다르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특정한 역사관이나 경제관, 정치적 참여 방식을 바람직한 시민의 조건으로 삼는 순간, 교육은 시민의 판단을 돕는 자리가 아니라 시민의 생각을 제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정부에 협력하는 단체가 지원사업과 교육을 맡고, 그 교육이 정부가 마련한 참여 절차와 연결되는 상황도 생각해볼 수 있다. 법안이 그런 결과를 이미 정해놓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교육과 지원, 참여가 한 체계에 묶이면 어떤 견해가 채택되고 어떤 목소리가 빠지는지 더욱 엄격하게 살펴야 한다.
정부가 듣고 싶은 목소리만 시민의 목소리로 인정되는 순간, 참여는 남아 있어도 시민의 자유는 줄어든다.
독일이 보여주는 교육의 경계
민주시민교육을 말할 때 독일의 정치교육이 자주 거론된다. 독일에는 공적 정치교육기관이 있다. 독일 사례가 국가의 교육 참여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독일이 오랜 논의를 거쳐 세운 교육의 경계는 살펴볼 만하다.
1970년대 정치교육 논의에서 정리된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교육자가 원하는 의견을 주입해 학습자의 독립적인 판단을 방해하지 말 것, 정치와 사회에서 논쟁 중인 사안은 교육에서도 논쟁 중인 것으로 다룰 것, 학습자가 자신의 처지와 이해관계를 분석하고 스스로 행동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을 강조했다.[3]
교육의 가치는 모든 시민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데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주장을 검토하고 자신의 판단을 세울 수 있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정부가 시민사회 소통과 지원을 종합하는 체계 안에 교육 기능까지 결합하는 방식에 동의하기 어렵다. 소통을 위한 기구가 시민에게 바람직한 생각을 가르치는 기구로 확대될 필요는 없다.
시민은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한국의 민주화는 국가가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권력이 국민의 자유를 제한할 때 수많은 시민이 그 권력에 맞섰기 때문에 가능했다.
학생과 노동자, 종교인과 지식인, 이름을 남기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판단하고 행동했다. 그들 모두가 같은 이념과 정치적 목표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민주화운동의 성과는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역사에 참여한 경험이 오늘날 특정 세력에게 시민의 올바른 생각을 정할 권한까지 주지는 않는다.
과거 권위주의 국가가 국민을 국가 발전의 대상으로 보고 동원했다면, 오늘의 국가는 시민을 참여와 교육의 대상으로 관리하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권력의 언어가 성장과 참여로 바뀌었다고 해서 시민 위에 서려는 태도까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기준은 어느 한 진영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진보 정부가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시민을 만들려는 시도에도, 보수 정부가 국가관을 앞세워 특정한 역사 해석을 주입하려는 시도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
시민은 어느 정권의 교육을 거쳐야 비로소 주권자가 되는 존재가 아니다.
시민에게 필요한 것은 판단할 수 있는 조건이다
시민참여기본법안의 민주시민교육 체계에 반대한다고 해서 시민의 배움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이 헌법과 법률을 이해하고, 세금과 예산을 읽고, 경제와 금융의 기본 원리를 익히며, 정책의 비용과 효과를 비교할 기회는 넓어져야 한다. 허위정보를 구별하고 서로 다른 주장에 근거를 요구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그 배움은 학교와 대학, 지역사회와 시민단체, 언론과 민간의 다양한 활동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한 기관이 시민의 이상적인 모습을 정하고 그에 맞추어 가르칠 필요는 없다.
예산을 배운다면 정부가 얼마를 지원했는지만이 아니라 그 돈이 어디서 왔고 다른 곳에 쓸 수 있었던 기회는 무엇인지 함께 살펴야 한다. 복지정책을 배운다면 지원받는 사람의 필요와 재원을 부담하는 사람의 입장, 미래세대가 감당할 책임을 함께 놓고 토론해야 한다.
시민참여를 배운다면 정부가 만든 위원회에 참여하는 방법뿐 아니라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예산 낭비를 찾아내고, 부당한 행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동네의 위험한 횡단보도를 함께 살피고, 주민들이 예산의 쓰임을 따지고, 작은 공익활동의 결과를 공유하는 경험도 시민을 성장시킨다. 시민은 이런 과정에서 자신의 판단이 언제 옳고 언제 틀렸는지 배우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며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
씨앗이 말하는 **시민화**는 시민이 일상에서 배우고 선택하며, 국가와 시민사회의 권력을 함께 감시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넓히는 일이다. 국가가 시민을 일정한 모습으로 만드는 계획이 아니다.
시민사회를 정부의 틀에 가두지 마라
씨앗의 소리는 시민참여기본법안에서 민주시민교육 조항 하나만 떼어내자는 입장이 아니다. **정부가 시민참여와 시민사회를 행정안전부 장관 소속 위원회의 종합체계로 묶는 조직구조 자체에 반대한다.**
시민사회와 정부 사이에는 소통구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구조는 시민사회가 정부의 계획에 참여하는 통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민사회가 독립적으로 의제를 제기하고, 정부를 비판하고, 정부의 답변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소통구조에 국가가 시민을 교육하는 기능까지 넣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시민의 말을 듣겠다며 만든 틀 안에서 정부가 시민에게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가르치려 한다면, 소통의 방향은 거꾸로 흐른다.
국회는 이 법안을 심사하면서 민간위원의 비율이나 교육사업의 필요성만 따져서는 안 된다. 위원과 의제를 누가 정하는지,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 단체의 목소리는 어떻게 전달되는지, 정부에 반대하는 시민사회가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시민단체도 마찬가지다. 누가 시민사회를 대표하는지, 정부와의 협의 과정에서 빠진 시민은 없는지, 공적 재원이 단체의 자율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시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시민사회가 살아 있다는 것은 정부와 협력하는 단체가 많다는 뜻만이 아니다. 정부와 다른 생각을 말하고, 정부의 사업에 반대하고, 정부가 듣고 싶지 않은 질문을 계속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시민은 국가가 길러내는 결과물이 아니다. 시민사회는 국가가 관리하는 참여조직이 아니다. 국가에 권한을 맡긴 시민이 자유롭게 말하고, 그 권한을 감시할 수 있을 때 시민참여는 비로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