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길을 비워주는 배려,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의 안전
급한 사람에게 길을 내주는 한 줄 서기에는 시민의 배려가 담겨 있다. 같은 에스컬레이터에서 안전하게 서 있는 사람의 사정까지 살피면, 비켜주는 마음과 기다리는 마음이 함께 필요해진다.
시민의 딜레마 ③
열차가 곧 들어온다는 안내가 들린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에스컬레이터 왼쪽으로 내려가는데 앞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다. 오른쪽은 서 있는 사람, 왼쪽은 급한 사람이 지나가는 자리라고 생각해온 터라 마음이 급해진다.
‘조금만 비켜주면 될 텐데.’
뒤에서는 걷지 말고 손잡이를 잡으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앞사람은 안전수칙을 지키고 있다. 나는 그 사람이 예절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같은 에스컬레이터에서 안전과 배려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비워둔 한쪽에는 시민의 배려가 있다
에스컬레이터 오른쪽에 서는 습관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는 서서 가도 괜찮으니 급한 사람이 지나갈 자리를 남겨두자는 것이다. 상대가 왜 급한지 일일이 묻지 않는다. 약속에 늦었을 수도 있고, 다음 열차를 놓치면 출근이 어려울 수도 있다. 모르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는 작은 양보다.
이 관행을 그저 한국인의 ‘빨리빨리’ 성격으로만 설명하면 그 안에 담긴 배려를 놓친다. 한쪽으로 몸을 옮기는 사람은 자신의 속도만 생각하지 않는다. 공공장소를 다른 사람과 함께 쓰고 있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실제 한 줄 서기를 둘러싼 갈등은 오래됐다. 헤럴드경제는 2017년에도 급한 사람에게 길을 내주는 것이 예절이라는 시민과, 옆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사람 때문에 불안하다는 시민의 목소리를 함께 전했다. 서로 다른 예절의 기준이 같은 공간에서 부딪히고 있었던 것이다.
지하철 문 양옆에 줄을 서고, 내리는 사람이 모두 나온 뒤 타는 습관도 같은 마음에서 출발한다. 서울의 공식 영문 관광안내는 외국인 방문객에게 ‘먼저 내리고 나중에 타기’를 주요 대중교통 예절로 소개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반복하는 작은 질서가 방문객에게 한국의 공공생활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런 질서는 소중하다. 누가 지켜보거나 벌금을 매기지 않아도 서로의 자리를 남겨두는 사회는 그만큼 함께 살기 편하다.
관리자는 비워진 자리보다 움직이는 사람을 본다
에스컬레이터를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다른 장면이 보인다. 움직이는 발판에서 걷고 뛰는 사람, 옆 사람과 스치는 가방, 갑자기 몸을 돌리는 승객이다. 한 사람이 균형을 잃으면 뒤에 있는 사람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한쪽에 이용자가 몰리면 기계에도 부담이 가지 않겠느냐는 생각은 자연스럽다. 다만 한 줄 서기 때문에 고장이 얼마나 늘고 수리비가 얼마나 더 드는지는 설비와 운행 조건을 따져볼 문제다. 추측만으로 비용 증가를 확정할 수는 없다.
확인되는 우려는 걷는 동작이 만드는 충격이다. 행정안전부가 올해 공개한 전문가 토론 내용에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걸으면 발판에 전해지는 충격이 커져 설비에 무리가 갈 수 있다는 설명이 담겼다. 승강기 제조사 코네도 이용자에게 손잡이를 잡고 가만히 서서 이동할 것을 안내한다.
급한 사람에게는 에스컬레이터가 이동 속도를 더하는 수단이다. 오래 서 있기 어렵거나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 사람에게는 몸을 맡기고 이동하는 수단이다. 같은 기계를 쓰면서 기대하는 역할이 다르다.
한 사람이 빨리 가는 것과 모두가 빨리 가는 것
왼쪽을 비우면 급한 사람은 빨리 갈 수 있다. 전체 이용자도 더 빨리 이동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영국 런던 홀본역에서는 에스컬레이터 양쪽에 서도록 하는 실험을 했다. 2016년 발표된 연구는 해당 실험에서 혼잡이 줄고 수송능력이 약 30% 늘었다고 보고했다. 비워두던 공간을 함께 사용하니 더 많은 사람이 이동한 것이다. 다만 안전 관련 자료에서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실험 하나로 모든 역에서 두 줄 서기가 더 안전하고 효율적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짧고 한산한 에스컬레이터와 길고 붐비는 에스컬레이터의 사정은 다르다. 내 앞의 몇 계단만 보면 비워진 왼쪽이 편리해 보인다. 입구에 길게 늘어선 사람까지 보면 그 빈자리가 대기 시간을 늘리는 공간일 수도 있다.
공공장소의 배려에는 이렇게 눈앞에서 보이는 사람과 아직 내 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이 함께 있다.
안내도 시민의 생활을 따라 바뀌었다
한국에서는 2007년 두 줄 서기 운동이 시작됐고, 2015년 중단됐다. 올해 다시 두 줄 서기 문제가 논의됐지만, 최근 정부가 내놓은 방향은 일률적인 줄 서기 방식의 강제가 아니었다.
행정안전부는 9월 23일 일률적인 두 줄 서기 캠페인과 규제를 더 이상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대신 손잡이 잡기, 걷거나 뛰지 않기, 안전선 지키기를 중심으로 교육과 이용 환경 개선을 추진하기로 했다.
시민이 오랫동안 지켜온 관행을 안내문 한 장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익숙한 관행이 안전수칙을 대신할 수도 없다. 운영기관은 위험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설명하고, 시민은 자신에게 익숙한 예절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부담이 되는지 살펴야 한다.
비켜주는 마음에는 기다리는 마음도 들어 있다
한쪽을 비워주는 배려는 좋은 마음에서 시작됐다. 그 마음이 ‘내가 지나갈 길이니 당신은 비켜야 한다’는 요구로 굳어지면 처음의 뜻이 달라진다.
앞사람이 왼쪽 손잡이를 잡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오른손을 다쳤을 수도 있고, 한쪽으로 몸을 옮기는 것이 불안할 수도 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움직이는 발판 위에서 자세를 바꾸기 어려운 사람일 수 있다.
길을 비워주는 사람의 사정만큼, 비켜주기 어려운 사람의 사정도 있다.
급한 마음에 곧바로 화를 내지 않고 잠시 기다리는 선택에도 시민의식이 담겨 있다. 앞사람을 예절 없는 사람으로 판단하기 전에 사정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빈틈을 찾아 몸을 비집고 내려가는 행동 역시 움직이는 발판에서는 상대의 균형을 흔들 수 있다.
먼저 내리고 나중에 타기는 내리는 사람의 길과 타는 사람의 길을 차례로 확보한다. 에스컬레이터 한쪽 비우기는 이동 중인 사람 옆으로 다른 사람이 지나가게 한다. 두 행동 모두 배려에서 출발했어도 안전에 미치는 영향까지 같지는 않다.
한 줄 서기에 담긴 시민의 배려를 깎아내릴 이유는 없다. 그 배려가 향하는 범위를 조금 더 넓혀볼 수는 있다.
급한 사람이 지나갈 자리를 남겨주는 마음. 앞사람이 불안해하면 재촉하지 않는 마음. 손잡이를 놓거나 몸을 틀도록 압박하지 않는 마음.
에스컬레이터 오른쪽에 서는 습관만으로 시민의식을 다 평가할 수는 없다. 내 앞에 선 사람이 움직이기 어려울 때, 그 몇 초를 기다릴 수 있는지도 함께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