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소리

칼럼

정동영의 평화에는 누가 빠져 있나

씨앗은 평화정책이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에게 양보를 요구하며, 그 비용을 누가 치르는지 묻는다. 장병의 안전과 북한 주민의 자유, 탈북민의 자기결정권을 기준으로 정동영 장관의 발언을 다시 읽는다.

장병 세 명이 지뢰에 다쳤다. 두 명은 발목 절단 등의 중상을 입었다. 군 당국은 북한이 군사분계선 남쪽에 의도적으로 매설한 지뢰 때문이라고 최종 판단하고 사과를 요구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10월 7일 국정감사에서 이를 “안타까운 사고”라고 부르며 장병들의 쾌유를 빌었다. 이어 근본적인 평화를 위한 노력이 더욱 절실해졌다고 말했다. [1]

평화가 절실하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다친 장병과 가족에게도 전쟁 없는 삶은 절실하다.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자신의 희생을 국가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같은 피해를 어떻게 막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답이다.

그 답을 듣기도 전에 피해가 평화정책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근거로 넘어가 버리면, 사람보다 정책이 앞에 서게 된다.

씨앗이 정동영 장관의 말에서 주목하는 지점이다. 장관이 북한에 얼마나 강경한 말을 했느냐만으로 대북정책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 정책이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에게 양보를 요구하며, 그 비용을 누가 치르는지 살펴야 한다.

다친 사람 앞에서 먼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정 장관은 귀국길에 올린 글에서 철저한 조사와 최종 결과에 따른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동시에 이번 일이 정부의 평화 노력을 폄훼하거나 왜곡하는 빌미가 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2]

여기에 우려스러운 순서가 있다. 국가가 보호해야 할 사람이 다쳤는데, 장관은 자신의 정책이 비판받을 가능성까지 함께 경계했다.

피해 원인과 정부 대응을 따지는 일은 시민의 정당한 감시다. 군의 경계와 작전은 적절했는지, 북한의 책임을 어떻게 물을 것인지, 정부가 내세운 긴장 완화 조치가 실제 안전에 도움이 됐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질문을 평화 노력에 대한 폄훼와 뒤섞으면 정책을 검증할 자리가 좁아진다.

장관은 조사에서 확인된 사실과 남아 있는 불확실성을 구분해 설명해야 한다. 그 설명은 피해자의 안전과 국가의 대응으로 이어져야 한다. 장관이 지키고 싶은 정책 방향으로 끝나서는 곤란하다.

평화정책도 시민의 평가를 받는 정책이다. 목적이 선하다는 이유로 검증에서 면제될 수 없다.

북한 정권의 불편함은 살피면서 주민의 고통은 어디에 놓는가

지난 3월 정 장관은 유엔 북한인권결의 공동제안국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밝혔다. 북한이 인권결의를 적대시 정책으로 본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이는 당시 장관이 밝힌 입장이며, 정부의 최종 결정과는 구분해야 한다. [3]

외교에서는 상대의 반응을 고려해야 한다. 대화를 열기 위해 표현이나 시기를 조정하는 판단도 있을 수 있다. 그 판단의 성과는 주민의 처지가 나아졌는지로 확인해야 한다.

인권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결과 북한 주민이 더 자유롭게 말하고 이동할 수 있게 됐는가. 억압받는 사람을 보호할 다른 통로가 마련됐는가. 대화의 문을 열기 위해 물러선 만큼 실제로 무엇을 얻었는가.

북한 정권이 싫어한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권을 억압하는 권력은 인권 문제 제기를 불편해할 수밖에 없다. 그 불편함을 정책 판단의 중심에 놓으면, 권력을 견제할 기준을 그 권력에 맡기는 셈이 된다.

북한에는 정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정권과의 관계 개선이 주민의 자유를 얼마나 넓혔는지까지 물어야 통일정책의 목적을 설명할 수 있다.

씨앗이 지키려는 자유는 남쪽 시민에게만 적용되는 구호가 아니다. 북한 주민의 자유도 같은 기준으로 바라봐야 한다. 통일을 말하면서 그들의 자유를 뒤로 미룬다면, 도대체 누구를 위한 통일인가.

자기 삶을 부르는 이름까지 장관이 정할 수는 없다

‘북향민’ 논란도 같은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정 장관은 ‘탈북민’이라는 표현의 부정적 어감을 지적하며 명칭 변경을 추진해 왔다. 차별을 줄이고 정착을 돕겠다는 취지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4]

그 취지가 당사자의 목소리보다 앞설 수는 없다.

탈북민 출신 박충권 의원은 이번 국정감사에서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명칭으로 계속 불리는 데 모욕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을 모든 탈북민의 생각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다만 장관이 선의로 고른 이름을 당사자가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5]

누군가에게 ‘탈북’은 차별의 표지가 아니라 자유를 찾아 떠났다는 자기 삶의 설명일 수 있다. 다른 누군가는 북에 두고 온 고향을 담은 이름을 선호할 수 있다. 그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

정부가 지원 대상의 행정상 명칭을 정하는 일과 한 사람의 삶을 대신 설명하는 일은 다르다. 시민은 정부가 더 보기 좋은 이름으로 정리할 대상이 아니다.

장관이 상대 체제를 존중하겠다고 말한다면, 자기 앞에서 다른 이름을 요구하는 시민도 존중해야 한다. 시민의 말을 듣는 일은 남북 대화가 성사된 뒤로 미룰 과제가 아니다.

평화를 말하는 사람도 평화의 비용을 설명해야 한다

이 발언들을 관통하는 우려는 정동영 장관의 속마음에 대한 추측이 아니다. 정책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구체적인 사람의 권리가 얼마나 앞에 놓이는가의 문제다.

장병이 다쳤을 때는 안전과 책임이 먼저 드러나야 한다. 북한인권을 다룰 때는 주민이 얻는 자유가 보여야 한다. 탈북민의 이름을 논할 때는 당사자가 자기 삶을 설명할 권리가 존중돼야 한다.

정부가 평화를 위해 무엇인가를 유보하거나 양보한다면, 그 이유와 성과를 시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과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접경지역 주민은 일상에서 위험을 감수한다. 장병과 가족은 몸과 삶으로 그 비용을 치른다. 북한 주민은 자유가 제한된 현실을 살아간다. 장관의 낙관적인 전망이 틀렸을 때 그 부담이 장관에게만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국가의 말은 신중해야 한다. 신중함은 책임을 흐리는 말투가 아니다. 확인된 사실을 밝히고, 시민이 감수할 위험을 설명하며, 판단이 틀렸을 때 수정할 기준을 내놓는 태도다.

통일부의 성과는 사람의 삶으로 확인하자

씨앗은 앞으로 통일부의 성과를 대화 제안의 횟수나 장관의 평화 선언으로 평가하지 않겠다.

이번 지뢰 피해 이후 장병 보호와 재발 방지 조치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인된 북한의 책임에 정부가 어떤 대응을 했는지 살피겠다. 북한인권을 제기하는 방식의 변화가 주민 보호에 어떤 실익을 가져왔는지 확인하겠다. 탈북민 정책에서는 당사자의 의견이 실제 결정에 반영되는지 보겠다.

이 기준 앞에서는 강경한 정부도, 유화적인 정부도 예외가 없다.

평화는 정부의 소유물이 아니다. 시민이 안전하게 살고 자유롭게 선택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시민의 희생과 침묵을 요구하면서 정책의 이름만 지켜서는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정동영 장관의 말에서 먼저 들려야 할 것은 평화정책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그 정책 아래에서 살아갈 사람에 대한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