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소리

칼럼

6·25전쟁, 중국은 왜 대한민국을 향해 총을 쏘았나

중국은 6·25전쟁을 항미원조의 승리로 기억한다. 한국에는 다시 빼앗긴 서울과 피란길이 남았다. 중국의 참전 동기와 북한 정권의 생존, 1992년 수교를 함께 살피며 대한민국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기준을 묻는다.

같은 전쟁, 다른 기억

1950년 10월,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은 이 전쟁을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돕고 나라를 지킨 ‘항미원조’로 기억한다. 대한민국의 기억에는 그 군대의 개입으로 다시 빼앗긴 서울과 피란길이 남아 있다. 같은 전쟁을 두고 한쪽은 승리를 기념하고, 다른 한쪽은 가족과 고향을 잃은 시간을 기억한다.[1][2]

중국은 왜 이 전쟁에 뛰어들었는가. 미국이 두려워서였는가. 공산주의 동맹을 지키기 위해서였는가. 북한을 자국의 안전을 위한 공간으로 남겨두고 싶어서였는가. 그 이유를 살펴보는 일은 오늘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도 필요하다. 중국이 무엇을 자기 안보의 문제로 여기며, 그 판단 앞에서 이웃 나라의 운명에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앞선 4편 [천 년의 이웃, 우리는 중국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columns/china-history-sovereignty-neighbor-part4-2026)에서 우리는 중국 대륙의 강대국과 한반도가 맺어온 관계를 살폈다. 문물을 배우고 교역하며 협력한 역사와, 주권을 위협받고 전쟁을 치른 역사가 함께 있었다. 6·25전쟁은 그 질문이 먼 왕조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한민국과 직접 싸운 중국은 오늘 우리가 거래하고 협력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었다.

전쟁의 출발점을 지워서는 중국의 참전을 설명할 수 없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당일 채택한 결의 82호에서 북한군의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공격을 평화의 파괴로 판단하고, 적대행위의 중단과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어 결의 83호는 회원국들에 대한민국이 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도록 권고했다.[3][4]

중국의 공식적인 전쟁 설명은 미국과 싸워 북한을 도왔다는 데 무게를 둔다. 그러나 그 설명만으로는 북한이 먼저 대한민국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미국과 유엔군은 이미 벌어진 남침에 대응해 참전했다. 중국군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 북한의 공격과 이를 막기 위한 국제사회의 대응이 있었다.

그 뒤 전쟁의 목표와 범위는 달라졌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을 거쳐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북한군을 물리치는 단계에서 북한 지역까지 진격하는 단계로 전쟁이 확대되자 중국 지도부는 국경 가까이에 미국 군대가 들어올 가능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2][5][6] 남침을 막는 문제와 북진 과정의 전략적 판단은 구분해서 평가할 수 있다. 북진의 위험을 따지는 일이 북한의 남침 책임을 없애지는 않는다.

중국은 한반도에서 자국의 안전을 계산했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수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정권이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로서는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일이 막대한 부담이었다. 그렇다고 북한의 붕괴와 미군의 국경 접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위험하다고 여겼다.

그 판단은 당시의 외교문서에 드러난다. 윌슨센터가 공개한 1950년 10월 14일자 소련 대사 로시친의 보고에는 미군이 중국 국경까지 진출하면 중국 동북지역이 지속적인 위협에 놓일 것이라는 마오쩌둥의 인식이 담겨 있다. 같은 보고에서 마오는 북한에 군대를 보내는 것이 중국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북한의 동지들을 도와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경 안보와 공산주의 동맹에 대한 의식이 함께 나타난다.[6]

전쟁은 대만 문제와도 연결됐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1950년 6월 27일 제7함대에 대만에 대한 공격을 저지하도록 명령하고, 대만 측에도 중국 본토에 대한 공중·해상 작전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7] 중국 지도부가 한반도의 전쟁을 자국 주변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과 연결해 받아들일 배경이 있었다.

이런 사정은 중국의 참전 동기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중국이 안보 위협을 느꼈다는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여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행동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 중국에는 자국의 안전이 중요했지만, 한국인에게는 침략을 물리치고 다시 삶을 꾸릴 권리가 중요했다. 강대국의 안보 계산이 이웃 나라 시민의 권리보다 언제나 앞설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중국의 선택을 평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를 이해하면서도, 그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벌인 전쟁의 책임은 별도로 물어야 한다.

‘지원군’이 지켜낸 것은 북한 정권이었다

중국은 군대에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 스스로도 중국 공산당과 정부가 참전을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국가 지도부의 결정으로 국경을 넘어온 군대였다. 중국 측 기록은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 도하를 명시한다.[1][2]

당시 소련과 중국 사이에는 군사 지원과 참전 여부를 둘러싼 협의와 주저함이 있었다. 소련 측 외교문서에는 중국 지도부가 논의를 거듭한 끝에 북한에 병력을 보내기로 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6] 중국은 상황을 지켜보기만 한 이웃이 아니었다. 전쟁에 뛰어들어 북한을 구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 결과 전쟁의 흐름이 바뀌었다. 중국군의 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했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공산군 수중에 들어갔다. 서울이 수복된 지 몇 달 만에 시민들은 또다시 도시를 떠나야 했다.[1][2] 전선의 이동이라는 말로는 그 시간을 다 설명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집을 버리는 일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손을 놓치는 일이었다.

중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한반도가 어떤 모습이 됐을지는 하나의 결말로 확정할 수 없다. 전쟁 이후의 통치와 재건, 강대국 간 충돌이라는 변수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군사 개입이 붕괴 위기에 놓인 북한 정권의 생존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중국은 한국군과 유엔군을 상대로 싸웠고, 북한은 살아남았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에도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은 북한군 최고사령관과 함께 유엔군사령관의 상대편으로 명시돼 있다. 협정은 교전을 멈추기 위한 군사적 합의였으며 영구적인 평화조약이 아니었다.[8] 중국은 한반도의 전쟁을 멀리서 중재한 나라가 아니라 직접 싸운 당사자였다.

중국의 승전 기억에서 빠져 있는 한국인의 삶

중국은 이 전쟁을 체제의 자부심으로 기념해 왔다. 시진핑은 2020년 10월 참전 70주년을 맞아 항미원조의 정신을 계승하자고 강조했다. 같은 달 중국 외교부는 이 전쟁의 승리를 평화와 정의의 관점에서 평가했다.[9][10] 중국의 공식적인 역사 인식이 무엇을 중심에 두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대한민국은 그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중국이 기념하는 군사적 성과에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후퇴가 포함돼 있다. 중국이 지켜냈다고 말하는 북한 정권 아래에서 살아가게 된 사람들의 운명도 있다. 중국의 승리를 설명하는 언어 안에 한국인의 안전과 자유는 어디에 놓여 있는가.

전쟁의 책임을 모두 중국 하나에 돌릴 수는 없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 지도부의 책임이 먼저 있으며 소련의 역할도 따져야 한다. 그렇다고 중국의 참전이 가져온 결과를 지울 수는 없다. 북한 정권의 생존을 도운 결정과 그 이후 북한 주민이 겪은 삶을 함께 바라볼 때, ‘북한을 도왔다’는 말도 누구를 도왔는지 다시 묻게 된다.

이 연재가 국가의 역사를 시민의 삶으로 읽으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에는 완충지대와 전선이지만, 그 안의 사람에게는 집과 가족, 일터와 미래다. 강대국이 확보한 안보상의 이익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손실까지 설명한 셈이 될 수는 없다.

수교 이후에도 남는 판단 기준

한국과 중국은 1992년 8월 24일 수교했다. 공동성명은 상호존중과 상호불가침, 내정 불간섭, 평등과 호혜, 평화공존을 관계의 원칙으로 제시했다.[11] 전쟁에서 싸웠던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협력의 길을 연 것은 현실을 바꾸려는 선택이었다. 오늘의 중국과 거래하고 교류하는 일에도 분명한 필요와 이익이 있다.

그 관계를 지키려면 6·25전쟁의 역사도 정확하게 기억해야 한다. 경제적 이익이 커졌다는 이유만으로 안보상의 이해관계까지 같아졌다고 볼 근거는 없다. 중국이 자국의 안전을 위해 한반도에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 요구가 한국의 독립적인 선택과 충돌하지 않는지를 사안마다 살펴야 한다.

1950년의 중국이 오늘의 모든 결정을 미리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중국 지도부가 한반도의 미래를 자국의 안보와 체제 유지에 연결해 판단했던 경험은 중요한 경고다. 한국의 평화와 중국이 원하는 한반도의 안정이 언제나 같은 뜻일 것이라는 기대만으로 국가의 안전을 맡길 수는 없다.

그 역사에 대한 책임은 당시의 정책을 결정하고 전쟁을 수행한 권력에 물어야 한다. 오늘 한국에서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가는 중국인 개인에게 전쟁의 책임을 떠넘길 이유는 없다. 중국 국가권력의 행동을 정확히 평가하는 일과 시민 사이의 자유로운 교류를 지키는 일은 함께 갈 수 있다.

한국 정부가 맡아야 할 책임도 구체적이다. 군사적 위험을 파악하고 방어 역량을 갖추며, 외교 협상에서 국민의 안전과 선택권을 지켜야 한다. 안보를 명분으로 시민의 비판을 막거나 기업의 정상적인 거래를 자의적으로 통제할 권한까지 얻는 것은 아니다. 유능하지만 제한된 국가가 필요한 이유는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권력 남용 모두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앞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평가할 기준은 분명하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 앞에서 중국이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한국이 스스로 선택한 방어 조치를 존중하는지, 수교 당시 약속한 상호존중과 내정 불간섭을 지키는지 봐야 한다. 우호를 말하는 외교적 수사보다 이런 행동이 관계의 실질을 보여준다.

6·25전쟁에서 중국은 북한 정권을 살리는 쪽을 선택했다. 대한민국은 그 선택과 싸웠고, 시민들은 그 대가를 치렀다. 중국과 협력할수록 이 역사를 또렷하게 기억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안전과 자유를 중국의 선의에 맡기지 않는 것, 그것이 전쟁의 기억을 오늘의 책임으로 이어가는 길이다.